배신은 평범한 인생의 통과의례. / 요 18:15-18, 25-27.
묵상자료 7592호(2022. 2. 28. 월요일).
시편 시 62:5-8.
찬송 20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행 중인 아내에게> 제주도 봄 바다는 아직도 우리 신혼 때 그 바다처럼 푸른가요? 건강에도 좋고 다이어트에도 좋고, 게다가 바다를 끼고 걸을 수 있어서 더 좋다는, <올래 길> 걷기는 착착 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전화는 걸지 않을 작정이요. 오랫동안 외국살이를 했던 친구, 그리고 여태 남편과 한창 손을 타는 자식들에게 보이지 않은 끈으로 칭칭 묶여 있던 또래 친구들이 몇몇이 묶였으니, 남편 전화라도 그리 반갑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일주일도 아니고 고작 3박 4일의 여행인데도 당신은 집 안팎을 참으로 단단히 챙겨놓고 떠났네요. 찌개에 국에 밑반찬을 냉장고에 차례대로 넣어 놓고는, 이건 어떻게 데워먹으라, 이건 언제 꺼내 먹으라, 일일이 메모지까지 붙여 놓은 걸, 당신이 떠난 다음에야 발견했지요. 고맙기도 했지만 많이 미안했었오. 도대체 얼마나 못미더웠으면 이렇게까지 단속을 해 놓고 떠났을까? 모처럼 편하게 남이 해주는 밤을 먹으면서도, 속으로는 남겨두고 온 식구들 걱정, 또 얼마나 할까? 생각이 참 많았지요. 여행가기전 친구들과 통화할 때, 당신은 그냥 무심코 남편 허락받았다고 좋아하던데, 그 때도 허락이라는 단어에 묘하게 마음이 좀 쓸쓸했지요. 양해를 구했다 정도도 아니고, 허락이라니. 아내로써 엄마로써의 당신이 삶에 당신이 얼마나 묶여 있었으면 은연중에 그런 표현을 할까 싶어서 미안했었지요. 멀리서나마 당신과 친구들의 여행이 성공작이기를 바래요. 그래서 이런 재미난 여행 우리 좀 더 자주자주 하자는 즐거운 공모도 하고 오시오. 그래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드네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년 3월 20일 방송> a.
2.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15-18절, 25-27절)”을 읽었습니다. 배신(背信)이란 문자 그대로 믿음을 등지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서글픈 경우를 두고 배신이라고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신뢰를 송두리째 내다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자면 우리들 삶에는 배신이라는 걸 밥 먹듯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신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이런저런 우스갯소리를 듣게 되는데, 예전의 4년제 신학교에서는 1학년생은 목사급, 2학년생은 전도사급, 3학년생은 장로급, 4학년생은 평신도급이 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신앙심이 얕아져서 목사급으로 출발한 학생이 나중에는 신앙심이 한 푼짜리인 평신도급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 듯 생각하면 이런 유의 배신행위는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필요불가결한 통과의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통계적으로 적지 않은 졸업생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혀 엉뚱한 길로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배신행위를 통과하는 동안에 제대로 목사의 길을 걷게 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베드로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앞장서기를 좋아하는 의리가 강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래서 생각 후에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내 뱉은 후에 생각하는 성격으로 자책과 후회가 늘 따르는 그런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다행히도 주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의 인품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고쳐주시려 힘쓰지 않고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본문은 감람산에서 제사장들의 사병에게 붙잡힌 주님께서 그해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필요하다가 공공연하게 말해오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어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안뜰로 끌려갔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을 잘 아는 다른 제자의 도움으로 문지기 하녀의 안내를 받아 심문받는 예수님을 멀찍이서 불을 쬐며 구경하는 경비병들 틈에 끼일 수 있었습니다. 먼저 그 하녀는 베드로를 알아보고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고, 아니라는 부인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희미한 불빛에서 베드로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고,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대답했고,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귀가 잘려진 사람의 친척이 베드로를 향해 제자 노릇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이번에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배신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배신이란 철썩 같이 믿어오던 신앙을 등지는 일만이 아닙니다. 평생 꿈꾸며 준비하던 삶의 목표를 바꾸는 일도, 가족을 지켜 주리라는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기대를 저버리는 일도, 벌거숭이 고향친구를 기억에서 지우는 것도 배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배신이 결코 부정적인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배신으로 인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눈을 뜨는 긍정적인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이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배신한 이 사건으로 인해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선택했던 배신이란, 근본을 부정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근본을 회복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로마 교외 카타콤베 입구의 쿠오바디스 교회에서 그 비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