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만 맡길 것을 기도하자. / 요 17:9-19.
묵상자료 7596호(2022. 3. 4. 금요일).
시편 시 63:8-11.
찬송 48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병규 엄마에게> 언제까지나 예쁜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데, 오늘은 일부러 병규 엄마라고 불러봤어. 병규 아빠가 병규 엄마에게 하고 실은 말, 더 정확하게는 부탁의 말이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가장 듣기 무서워하는 말이 바로 당신이 알아서 해 라지. 그것도 무슨 가구를 사는 일이나 이사 가는 동네를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 자식의 문제일 때 남편들이 툭 던지는 당신이 알아서 해. 라는 말, 남편 입장에서 생각해도 무섭긴 무서울 것 같애. 하지만 그 말에는 지금껏 잘해왔으니 그냥 그대로 하라는 무언의 동의가 포함 돼 있다고 생각해. 비난도 책임 회피도 아닌 무언의 동의.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어느 정도는 엄마들의 열의를 아버지들이 따라 잡을 수 없다는 포기의 마음도 들어있겠다 싶더군. 그래서 이 편지를 써 보기로 결심을 했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절대로 포기 하지 않는 다는 다짐의 편지이기도 해. 병규의 방황에 당신이 아주 힘들어 하고 있다는 거, 나도 모르진 않아. 하지만 이번엔 어쩐지 좀 두고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물론 두고 보는 사이에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잇다는 것도 알고, 회복하기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겠어. 하지만 난 조금만 더 기다려주고 싶어. 왜냐하면 난 병규의 반응을 건강한 반응이라고 믿는 편이거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 보는 나이, 고민하다가 벽에 부딪혔는데 그 벽을 뚫고 나가기가 힘드니까, 슬쩍 뒷길로 빠져서 놀아도 보는 나이 아니겠어? 병규는 오래 안 갈 거야. 금방 돌아올 거야. 돌아오는 것이 자기 발로 제 힘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앞으로 무엇을 하든 더 현명하고 용감하게 헤쳐 나갈 수 있어. 그러니 이번엔 당신이 조금만 더 참아주면 좋겠어.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년 3월 23일 방송> a.
2. “제자를 위해 기도하시다 2(9-19절)”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들으라!(혹은 쉐마)” 라는 교육지침이 있습니다. 그 중심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 내용을 가르치는 방법이 아주 대단하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이 말을, 집에 있거나 들에 있거나 길을 걷거나 누웠거나 앉아 있을 때, 언제 어느 때든지 자기 자녀에게 말해 주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이런 교육방법을 사용한다면 아예 <또 잔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나라에서는 이런 잔소리를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를 가르칠 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공동번역에서는 “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는 아디아레잎토스(αδιαλειπτως)로 “끊임없이, 계속적으로”란 의미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의 기도는 “이루어질 때까지”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 우리 주님의 기도는 이루어질 때까지 드리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기도에는 몇 가지 강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매우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며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이 사람들을 위해서 간구”한다고 말씀하십니다(9-10절). 그들 제자들은 주님께서 당신의 생각과 계획 그리고 사랑뿐만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다 주고 싶은 이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제자들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1-19절). 그것은 그들의 꿈과 목표는 이 세상과는 너무 다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서 살기에는 너무 힘든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우리 주변의 크리스천들의 기도를 들으면 함량이 미달인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성공하게 해 달라거나, 공부를 잘 하게 해달라는 내용들이 많은데 이런 기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성공은 행운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거나 공부하면 바람직한 성공이나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습니다. 굳이 하나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격려하고 관리할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처럼, 너무 다른 환경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힘들고 위험한 일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할 일입니다. 요즘 이런저런 책들을 읽어서 딱히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에는 남지 않았지만, “가난은 벗어날 수 있다.”는 주제의 글에서는 엄청난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을 참을성이라고 했습니다. 참을성을 기르기 위해서 학생은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고 했고, 노동자는 반복의 지루함을 버텨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주제는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얘기를 듣고 밤늦게까지 고민하다가, 하늘에 빛나는 별무리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했다 합니다. “하나님, 이 세상은 누구의 것입니까? 루터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세상이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결하십시오. 저는 피곤해서 자러 들어가겠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 맙시다.
3. 오늘 저는 사전 투표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