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행이 정죄 받는 두 가지 이유. / 고전 5:1-8.
묵상자료 7607호(2022. 3. 15. 화요일).
시편 시 66:10-12.
찬송 52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막다른 길에서 인간은 두 가지 행동을 한다. 하나는 최후를 떳떳하게 마감하기 위해 맞서 싸우다 죽는 길이고, 하나는 나머지 목숨이나마 부지해보려고 비겁하게 굴종하는 길이다. 총칼 앞에 용감하게 죽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장한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고개 숙여 비굴하게 살아남는 사람도 나무랄 수 없다. 이 지구 위에서 용감한 사람만 있었다면 세상엔 사람의 씨가 벌써 사라졌을 것이다. 비굴하게 살아남은 사람도 역시 피해자이다. 문제는 칼자루를 잡고 있는 쪽이다. 농민이든 어민이든 노동자이든 칼을 뺏기 위해 싸움을 할 수는 없다. 그 누구의 손에 잡히든 칼은 무고한 목숨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자면 하루속히 무기를 없애야 한다. 강대국들의 무기는 물론 그 강대국에 의해 종노릇하는 제3세계의 괴뢰정권도, 그리고 그 괴뢰정권에 붙어사는 지식인과 종교지도자와 공직자도 바로 서야 한다. 그게 먼저 되어야 한다. 농민과 농촌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이런 모든 이들의 책임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온통 외국산 수입자재로 지어졌다는 호화판 빌라가 수십억 원씩 불티나게 팔린다는 그런 부조리부터 없애야 한다. 땀 흘리지 않고, 손에 때 묻히지 않고, 흙가루, 시멘트가루, 기름 찌꺼기, 비린내 묻히지 않고, 등에 시멘트 부대 메어보지 않고, 지게 져보지 않고, 그러면서도 돈을 물 쓰듯 하는 그런 잘못된 것부터 고쳐야 한다. 내 자식만 일등하기 바라고, 내 자식만 일류대학 보내려는 그런 욕심부터 없애야 한다. 나만 축복받기 위하여 수천만 원씩 절간에다 시주하고, 교회에다 헌금하고 자랑하는 그런 양심부터 쓸어내야 한다. 콩나물 한줌 사는 데는 십 원 동전 하나라도 깎으려 하면서, 우리 농민들의 쌀은 외면하면서, 외국산 수입품 고급 옷이야 핸드백이야 보석이야 과일이야 냉장고야, 온통 그런 것들은 펑펑 선심 쓰듯 폼 잡고 사들이는 그런 심보부터 고쳐야 한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pp.75-76.
2. “음행에 대한 바울의 단죄(1-8절)”을 읽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죄명이 있건만 유독 음행 죄를 밝히고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노아의 홍수라는 무서운 형벌의 원인을 기록한 창 6장 2-3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중략> 아내를 삼았다. 그래서 야훼께서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공동번역) 라고 기록했는데, 음행 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비화에도 그들이 지은 “엄청난 죄” 속에는 음행이 대표적인 내용이었습니다(창 19:4-5). 이렇듯 간음죄란 우리 인류가 극복해야 할 보편적인 죄악이며, 동시에 치명적인 죄악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의 새 어머니와 동거하는 구체적인 현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관계까지도 여지없이 깨트려 버리는 무서운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한 때 우리 사회에서 “Me Too!” 운동이 일어나 연예계는 물론 정치계 학계 종교계에서도 큰 소용돌이가 휘몰아쳤습니다. 그 결과 많은 유명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처참하게 곤두박질치는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미투운동은 수십 년 전의 학생시절까지도 소환되었고, 언제든 터질 수 있는 뇌관을 감추고 있는 채, 휴식기에 들어간 듯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음행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지도급일 경우에 그 파급력이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라는 암시입니다. 슬프게도 부흥회가 자주 열리던 70년대에서 90년대 까지는 부흥사들의 걸쭉한 입담에는 음담패설이 비중 있게 취급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사도의 지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잘난 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도 무슨 공(功)이라도 세운 양 자랑하고 다니는 경우입니다. 사도는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그 육체를 멸망시키도록 교회 앞에서 단죄를 했었다고 술회합니다. 이런 단죄의 목적은 주님의 심판 날에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음행이란 묵은 누룩임으로 깨끗이 없애 버려야 할 것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룩의 역할은 먹기 좋게 빵을 부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효모를 말하는데, 그 영향력은 엄청나다는 뜻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유월절에 먹는 누룩 없는 빵이 강조되는데, 이는 피난길에 오를 그 백성들의 허기질 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채워줄 수 있게 하려는 깊은 뜻이었습니다. 출애굽을 앞두고 먹게 한 누룩 없는 빵이란, 누룩을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실용성에 의미를 두었다고 한다면, 본문에서 음행으로 비유된 누룩은 순수성을 잃게 하는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정당한 남녀관계가 아닌 “동물의 교섭에 지나지 않”(창 6:3)는 부도덕적하고 비윤리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남녀관계는 더 이상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개나 소 같은 동물적인 관계로 전락해 버렸다는 뜻입니다. 음행이 정죄 받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