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깨비를 믿으라면 또 다시 끌려다니겠습니까? / 고전 8:1-13.
묵상자료 7615호(2022. 3. 23. 수요일).
시편 시 68:7-8.
찬송 35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의 극악한 폭력에 대하여 침묵만 하시는가? 왜 저 많은 사람이 억울하고 처참한 죽음을 당하도록 구경만 하신단 말인가?’ 나치 시대에 아우슈비츠를 경험했고, 1986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던 유다인 엘리 위젤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슬픈 천사의 얼굴을 한 어린이가 교수형 당하는 것을 목격한 날, 무시무시한 날들 중에서도 소름 끼치는 그날, 소년은 뒤에 있던 어떤 사람이 신음하듯 내뱉는 말을 들었다. ‘하느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느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이처럼 유다인이 발견한 대답은 하느님은 고통받는 순간에 못 본 체하고 침묵만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교수대에서 함께 처형되었던 것입니다. <중략> 연민을 표현하는 영어의 compassion이나 독일어의 mitleiden도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고통을 모르면서 인간의 고통에 동참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인간과는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고통을 모르는 비정한 하느님, 무감각한 하느님을 우리는 인격신으로, 사랑의 하느님으로, 자비의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이를 나치 시대에 암살범으로 몰려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통받지 않는 하느님은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역설입니다.” 차동엽, <잊혀진 질문>, p.208.
2. “우상앞에 놓았던 제물(1-13절)”을 읽었습니다. 며칠 전 경동시장 푸줏간에서 돼지 머리에 “제수용”이라고 쓴 글귀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하루에도 수 백 수 천 마리의 돼지를 잡기 때문에 돼지 머리 구하기가 힘들지 않았지만, 1세기 고린도 시장에서는 돼지 머리가 귀해서, 이집 저집의 제사상에 올려졌던 돼지 머리들이 팔리거나 임대되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안동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식당 메뉴 중에는 <헛제사밥>이라는 게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물려난 음식들을 대접에 비벼먹도록 나오는 음식입니다. 제가 살던 고향에서는 제사를 지낸 이웃들이 담장 너머로 제사밥을 나눠주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 음식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십계명 제1계명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사상에 올려졌던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제사상에 올려진 제물들이 우리들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바닷고기들은 용왕께 풍어제를 드리고 잡아온 것들이고,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재료들은 방직기계들을 들여놓고 고사를 지낸 다음에 짠 베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잠실 야구 경기장에는 해마다 시합을 앞두고 무사고를 비는 고사제가 열린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곤 합니다. 버스도 기차도 비행기도 모두 고사를 지낸 후 운행하는 것들입니다. 과연 우상에게 절한 것들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우상 숭배란 무엇인가? 우상과 무관한 것들을 찾아볼 수 있을까? 등등 말입니다. 의식주 등 모든 우리들 삶의 필수품목들은 모두 우상숭배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는 우상숭배의 세상 한 복판에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디까지 피해야 하며, 우상의 세상으로부터 도망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적어도 세상에서 굶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우상의 문제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생각하자는 말입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거짓 신을 말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스스로의 우상(아이돌/Idol)을 만들고 있습니다. 노래 좀 하거나 연기 좀 하나는 사람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허깨비를 신처럼 섬기는 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둘째는 허깨비를 섬긴 제물이나 생활용품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우상을 발가락의 때처럼 여길 신앙이 준비되어 있을 경우에만 말입니다. 사도는 먹고 마시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 유명한 아디아포라 신학이 생겼습니다. 아디아포라, 아무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헬라어 입니다. 중립이라는 뜻입니다. 제사 음식을 우상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것입니다. 행여 허깨비를 하나님이라고 믿겠다할 분이 있겠습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