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자신의 신앙 양심을 압도하는 공식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고전 10:14-11:1.

박성완 2022. 3. 28. 00:00

묵상자료 7620(2022. 3. 28. 월요일).

시편 시 68:22-24.

찬송 10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이야기는 중동에서 기원한 두 편의 창조설화를 조합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다루지만, 기록 시기는 비교적 최근으로 알려진 제사문서를 보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한다. 하나님은 처음에 빛과 물과 땅이 있으라고 말했고, 그 후에는 식물과 하늘이 있으라 말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은 역시 말씀으로 새와 들짐승과 물고기를 창조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 이것이 <창세기>1장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창세기>를 기록한 다른 하나는 기록 시기가 앞서는 야훼문서. 여기에는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 노아와 바벨탑 등에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창세기>2장부터 11장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창조가 말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한 <창세기>1, 즉 제사문서를 이해하려면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기본적인 가정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형태와 내용에서 이 가정은 역사적으로 한참 나중에 탄생한 과학의 가정과 무척 다르다.

   과학적 진리는 기껏해야 500년 전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등의 저자들을 통해 세상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 사람들은 세상을 과학의 관점으로 보지 않았다. 지금은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지독히 물질주의적이어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먼 옛날, 문화의 기본적인 토대가 만들어지던 시절에 살던 사람들의 주 관심사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따라서 생존이라는 목표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려 했다.”

조던 B. 피터슨, <12가지 인생의 법칙>, pp.62-63.

 

2. “우상숭배의 경고2(14-22)”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23-11:1)”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 속에서 살면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에 대해서 확고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신앙을 확립하기 위해서 무려 40년이란 길고 긴 시련과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광야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게 했고, 그곳에서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온갖 시련들을 맞부딪혀야 했습니다. 첫째는 매일의 양식이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살 수 없는 모래사막 한 복판에서 하루 두 차례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다음으로는 뜨거운 사막에서 타는 목을 축일 마실 물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물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마실 물을 주셨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낮의 뜨거운 열기와 밤의 차가운 냉기에서 살아갈 방법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밤의 냉기를 몰아내셨습니다. 수시로 싸움을 걸어오는 이방 민족들로부터 하나님은 그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지켜주시고 물리쳐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쉐마(들으라!)”는 하나님 신앙 규범을 제정(6:4-9), 오고 오는 후손들에게까지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한분 하나님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우상숭배란 단순히 돌이나 나무에 새긴 형상에게 절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것들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에 사용했던 제물들을 먹고 마시는 일을 비롯해서,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 묻고 고민해야 할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 노릇을 하는 무당이나 박수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이야말로 적극적인 우상숭배자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문제는 매우 난처한 경우가 발생합니다. 낯선 문화권이나 낯선 사람의 초대를 받았을 때, 대접받는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인지 여부를 확인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것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라고 말한다면, 먹을지 말지를 판단하기 쉬울 테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한 가지 공식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신앙양심에 따라 먹고 마실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공식에 대입했을 때, 가능한지 여부를 결정하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살아가는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