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관계. / 고전 12:12-26.
묵상자료 7623호(2022. 3. 31. 목요일).
시편 시 68:33-35.
찬송 34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카를 힐티는 같은 통찰력을 보다 직설적으로 전합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신의 본질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신이 아니며 신을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같은 취지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삼단논법으로 말합니다. ‘인간은 유한하다. 하지만 신은 무한하다. 유한한 것은 결코 무한한 것을 밝혀낼 수 없다.’ 서양사에서 천 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하는 지성으로 꼽히는 논객의 군더더기 없는 논리에 누가 이의를 달겠습니까?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은 한결 친절한 어투로 우리에게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사유법을 가르쳐 줍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신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네. 신은 철학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철학의 대상은 인간과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뜻이야. 알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것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없는 돈으로 집을 사겠다는 생각과 다를 바 없다네.’ 이 말에 질문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베이컨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닐세. 나는 신을 믿고 숭배하네. 하지만 지식으로 신을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사실 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전무한 상태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신을 지식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다만 신을 숭배하고 찬미할 뿐, 결코 신을 철학의 연구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이론을 전개하겠다는 것은 허공에 뜬 채로 잠을 자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네. 알아듣겠나?”
차동엽, <잊혀진 질문>, pp.151-152.
2.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1(12-26절)”을 읽었습니다. 말과 글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도구입니다. 말은 같은 시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도구이고, 글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전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글보다 말의 파급력이나 생명력이 덜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말과 글의 특성과 효과를 일찍 깨닫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강연이나 설교 등 특별한 역사적 환경을 그 배경에 두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40년도 넘은 어느 날, 해직교수 중 저를 가르치셨던 세 분 교수님이 석방되셨다 연락이 와 신촌 노고산의 어느 식당에서 환영회를 가졌데, 한 구약교수님이 자신은 별로 한 일도 없이 구속되었는데, 옥중에서 여러 대학교 학생들의 학장 노릇을 하느라 큰 역할을 했노라 농으로 운을 떼셨습니다. 그때처럼 학장님이란 호칭이 정답게 들린 적이 없었노라 하셨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위로가 되고 동시에 희망이 되었던 한 마디 “학장님!” 훗날을 살면서 두고두고 여운이 남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몸과 그 지체라는 그림어로 풀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직설적인 말이나 글보다는 오히려 은유나 비유와 같은 그림어(figure)가 이해를 돕는데 효과적일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대상과의 관계를 얘기할 때 그렇습니다. 가령 제가 초등학교 때 동네 친구와의 찍은 사진을 보면, “영원히 변치 않을 우정”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친했으면 그런 구절을 적어 넣었을까 싶기도 한데, 몇 년 전 조카 결혼식장에서 잠깐 만났는데, 변해버린 우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습관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요즘 많이 사용하는 이모티곤 몇 개를 그려 넣었더라면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사도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몸과 지체라는 그림어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몸에는 백가지 지체가 있습니다. 백가지 지체들을 다 모은 것이 몸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지체로 몸에서 분리해낼 수가 없다는 진리입니다. 죽음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분리할 수 없는 붙어 있어야만 하는 관계, 주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가 이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부를 찬송을 허투루 부르지 않고, 진심을 다해서 부르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