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하나님의 안식에 이르는 관문. / 히 4:1-13.
묵상자료 7639호(2022. 4. 16. 토요일).
시편 시 71:7-9.
찬송 14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커피한 잔을 사려고 줄을 서는데요. 생방송 때문에 제가 조금 서둘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차례를 양보해 주시는 아주 친절한 분을 만났습니다. 사실 별 일 아니지 않아요? 그런데 그 때부터 기분이 참 좋아지더군요. 영어에서 친절을 뜻하는 kindness 라는 단어의 어원은 가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가족을 대하듯 남을 좀 배려하고, 또 찾는 것이 친절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겠지요.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먼저 양보하는 분계시지요. 또 문을 열고 나가는데 잠시 그 문을 잡아주는 사람, 또 작은 실수를 웃음으로 넘겨주는 사람. 사소한 일들 같지만 일상은 이런 사소한 일들로 짝잇기 한 보자기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요. 친절은 전염이 된다고 하니까 저도 오늘 주위 사람들에게 먼저 친절한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미소를 짓고 조금 더 움직이고, 또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년 4월 20일 방송>
2. “하나님의 안식을 누릴 사람들(1-13절)”을 읽었습니다. 요즘 부쩍 부음(訃音)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함께 교회를 섬겼던 분들이나 동료 목회자들의 부모님들이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저는 유족들에게 천국에 소망을 두자며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저는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열심히 일한 고단하게 사람에게는 잠자리가 행복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잠을 자는 동안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 그리고 온갖 두려움과 복잡한 일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다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동안의 한시적인 평화일 뿐, 새 아침과 함께 되살아날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필요합니다. 그 안식을 천국생활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문제없는 천국생활보다는 문제 많은 지상생활이 더 나은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천국을 가장 간단한 몇 마디 말, 평화와 안식이라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천국에 관한 질문은 언제나 저를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특히 젊은이의 죽음 그리고 어린 학생들의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를 물을 때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죽음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 말입니다. 오늘이 세월호 참사 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는 1주기를 뜻있게 보내고 싶어서 팽목항을 찾았었고, 다행히 사고 현장까지 20명을 태운 낚시 선박을 타고 갈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 현장에는 사고 지점을 알리는 부표가 떠 있었고, 파도는 높이 치솟고 있었습니다. 저의 교회 협동목사였던 독일인 목사님은, “그 학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선생의 말을 따라서 죽었다.”고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언쟁이 생겼고, 그 일로 좋았던 관계가 깨트려지는가 했는데, 마지막 헤어질 때쯤에는 어중 쩡하게 봉합되었습니다. 그 어린 학생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어떻게 순종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참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헤매면서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 비해서,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눈을 감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의 다른 이름인 순종의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나, 불순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이르는 죽음이야말로 최상의 축복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시 95:1-11).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