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노예가 될 순 없을까? / 출 40:18-38.
묵상자료 7667호(2022. 5. 14. 토요일).
시편 시 75:8-10.
찬송 5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울고 있을 때 눈물을 닦아 주기보다는, 같이 울어줄 수 있고, 아무 말 없이 어깨가 축 쳐져 있을 때, 그 이유를 묻지 않고 어깨를 감싸 줄 수 있는 사람, 거창한 선물이나 인사는 받지 못하지만 바람처럼 가벼운 격려에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지는 그러한 관계. 그런 관계는 대부분 가족과 맺게 되지요. 물론 친구나 동료와도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쎄요. 가족만큼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좋은 가족의 일원이 되려면, 힘들 때 숨기기보다는 기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일도 큰일처럼 챙겨줘야 하지요. 어느 새 작은 한숨이나 웃음이나 놓치지 않는 서로를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무척 어려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넣어두지 않아도 저절로 할 수 있는 그러한 관계이겠지요. 가족이라는 이름을 나누어 가지는 순간 저절로 이루어지지요. 가족이라는 이름, 생각할수록 참 소중하고 고마운 이름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5월 14일 방송>
2. “야훼께 성막을 세워 바치다(16-33절)”과 “야훼의 영광이 성막을 떠나지 않다(34-38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모세가 성막을 야훼 하나님께 지어 바친 것과,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성막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섬긴 포터블 성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언제든 이동해야 했기에 일반 백성들이 잠자고 쉴 수 있는 장막과 같이 천으로 준비된 성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모세가 지은 성막은 “야훼께서 지시하신 대로 하였다.”라는 구절이 아홉 번이나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예배할 성막은 그냥 대충대충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열까지를 야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지었다는 말입니다. 1861-1865년까지 미국에서 벌어진 남북전쟁은 남부 연합군의 패배로, 노예제도를 폐지되는(1985. 12. 18)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흑인들이 노예제도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합니다. 일부 흑인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자유를 어떻게 누릴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인에게 자유를 포기하는 각서를 쓰고 다시 노예로 산 이들도 있었다 합니다. 노예로 사는 것이 어쩌면 가장 편안한 자유였는지 모릅니다. 오늘 모세는 자신의 뜻대로 성막을 짓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성막을 지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대목입니다. 종교 개혁 이후에 자유의지 논쟁이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되는 중입니다만,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가 참된 자유일지가 아니며, 루터는 인간의 참된 자유는 하나님께 노예일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을 통해서 이를 밝히는데,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 서 있어 짐을 지는 짐승과 같아서, 하나님이나 마귀가 그 짐승을 올라타거나 `소유'하거나 `탈'수 있어서 짐승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주장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에 관하여>(1524,9)를 읽은 루터가 그의 논문을 읽고 격분했고, 완전히 결별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일 년 후인 1525년 12월 <노예 의지론>을 발표하였던 것입니다. 자유의지의 잘못을 지적한 많은 내용 가운데 하나만 소개하면, <구원은 자유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마귀에 속한 자유의지가 어떻게 구원을 이루겠는가. 구원은 사람의 영혼을 사단의 손에서 빼앗아 오는 것이다.(요 10:28-29)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너뜨리고 파괴하신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한다. 오직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만이 죄인들을 치유하고 회복한다.”
둘째 단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날 성전을 이해하는데 시금석이 되는 역할을 한다 하겠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성막이 멈추어 있을 때는 성막 위에 구름이 덮고 있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이 멈추었다 함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기간이라 할 것입니다. 구름이 걷힐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동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의 의미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 예배자들과 교제하시는 자리이며, 예배 가운데 임재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인간과 함께 하시는 거룩한 시간이며 장소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예배가 세속화 된 나머지 온갖 불경스러운 작태를 빗고 있는 것은 심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방문한 자리에 격식을 차려 응대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예배를 온갖 불경스러운 언사를 내뱉고 무당 굿거리를 하는 오늘의 현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성막을 구름이 뒤덮을 때 감히 모세조차도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