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야훼의 이름 때문. / 겔 36:22-27.
묵상자료 7688호(2022. 6. 4. 토요일).
시편 시 78:38-42.
찬송 9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풀에 빗대서 속마음을 임에게 띄워 보내는 일, 이런 경험 있으십니까? 글쎄요. 예전엔 이러한 것들이 흔했다고 하지요. 아마도 부드럽고 깨끗한 풀이 지천에 널려 있던 시절에서나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김소월의 시 <풀 따기>의 화자는 임을 생각하는 마음을 풀잎에 담아 시냇물에 흘러 보냅니다. 놀이는 아니지만 마치 놀이처럼 파란 풀잎을 던져 넣고 있지요. 임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속내를 풀잎을 따서 반복해 던지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은 멀어져만 가지요. 김소월 시 김원호 곡 <풀 따기> 준비했습니다. 작곡가 김원호는 소월의 시를 읽고서 자신의 마음을 들킨 듯한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열병처럼 사랑했다가 놓쳐버린 첫사랑의 인연을 그리워하던 그러한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더 실감났다고 하고요. 물결 따라서 풀잎이 흘러가듯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멜로디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고 했습니다. “우리 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 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 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해적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엾은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말해 보아요.” 파아란 풀들이 떠가며 강바닥에 그늘을 만드는 모습이 연상되는 그러한 곡이지요. 1958년 작곡 되었습니다. 김원호 선생의 대표곡 <언덕에서>를 작곡한 그 해 함께 지은 곡인데요. 작곡가의 초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잇겠지요. 이 곡 <풀 따기>가 첫 선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8년 부산 시향과의 협연으로 부산에서 가진 제1회 작곡 발표회여서 였습니다. 엇갈린 인연이 주는 애틋한 감정이 잔잔하게 다가오는 이 곡을 두고서 동요적인 청순한 입김이 서려 있다는 평을 하더군요. 시인의 시상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화려한 악상을 배제를 했다는 작곡가의 말에서, 그러한 이유를 짐작할 향토색 짙은 아름다운 가곡 <풀 따기> 함께 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6월 4일 방송>
2. “야훼의 이름 때문에(22-27절)”을 읽었습니다. 최근에 <이름의 신학>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어 흥미를 가지고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야훼의 백성인 유대민족이 뭇 민족에게 야훼의 이름을 멸시받게 하였지만, 야훼는 자신의 이름 때문에 잠잠할 수 없고, 행동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에서는 이의 연장선에서 예수의 이름이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는데, 특히 구원사역과 관련해서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야훼 하나님 이름의 총괄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이 논문의 요점입니다. 앞으로 이른바 이름 신학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을 위해서 논문 두 편을 소개합니다. 발표자 1. 김영선, “이름 신학을 말한다” : 이름신학 정립의 주요 명제 이해, 2. 유복곤, “헨 이름신학의 신비에 대한 헬라어 문법적 통찰력”, 예명 대학원 대학교 발행.
이름은 어떤 존재의 정체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주일학교에서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놀랍게도 그 선생님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들 앞으로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옛날 친구의 모습이 가물가물하였는데, 시골 동생이 그 이름을 불러주자 갑자기 또렷하게 소환되어 어제 본 듯합니다. 우리는 짐승의 이름을 지은 아담의 후예답게, 이름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뭇 민족에게 멸시받게 한 사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드는 삶을 살고 있는 오늘의 성도들을 그리고 지도자들을 생각합니다. 무식한 장돌뱅이나 할 수 있는 쌍소리를 하나님께 돌리는 그런 위인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 때문에 다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받지 않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들어낸다면” 이라는 단서를 붙이고서 말입니다. 그래서 곰곰이 되씹어 봅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화수로 더러운 것을 씻어 주시고, 우상을 섬기던 중에 묻었던 더러운 때를 깨끗이 씻어주고, 새 마음을 주시고, 새 기운을 불어넣어주시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야훼의 이름을 위해서, 그리고 예수 그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행동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분명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행동이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