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 딤전 6:3-10.
묵상자료 7709호(2022. 6. 25. 토요일).
시편 시 81:15-16.
찬송 49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삶이란 것이 그렇다. 우리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 체제를 세운다.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가를 만든다. 이런 체제의 밑바탕이 되는 원칙을 정하고 믿음의 체계를 만든다. 처음에는 아담과 하와처럼 낙원과 같은 곳에서 순수한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성공이 계속되면 무사안일에 빠져 마땅히 해야 할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현재 가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어렵고 귀찮고 안 좋은 일에는 눈을 감아 버린다. 세상이 변하고 타락의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은 현실 세계의 잘못일까? 하나님의 잘못일까? 아니면 우리의 부주의 때문일까? 2005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1,200여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역대 최악의 자연재해로 기록되었다. 카트리나가 남긴 상처는 과연 자연재해 때문이었을까? 해수면보다 지면이 낮은 네덜란드는 제방을 쌓아 수해를 대비한다. 미국 역시 최악의 참사를 막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홍수 피해를 염려한 몇몇 사람의 경고는 번번이 무시당했다. 1965년 제정된 ‘홍수방지법’은 뉴올리언스 북쪽에 있는 포차트레인 호수에 수위를 통제하는 제방 시스템을 갖출 것을 지시했다. 뉴올리언스는 루이지애나 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였다. 법령은 제방 시스템 개선 시한을 1978년으로 규정해 놓았지만, 40여년이 지난 후에도 전체 공정의 60% 정도만 완성되었을 뿐이다. 결국 이 호수가 넘쳐흐르며 뉴올리언스에서만 7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의도적 회피와 부패가 뉴올리언스라는 도시를 삼켜버린 것이다. 허리케인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이다. 하지만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준비하지 않은 인간의 잘못이 불필요한 피해를 키웠다. 각자가 제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이다.”
조던 B. 피터슨, <12가지 인생의 법칙>, pp.231-232.
2. “만족할 줄 아는 신앙생활(3-10절)”을 읽었습니다.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의 차이는 한 끝 차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 끝이란 화투 놀이 중에 <고스톱>이란 놀이를 말하는데, 놀이를 계속 진행하거나 멈출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을 때, 자신에게 유리하면 “고!”, 불리하면 “스톱!”을 한다는 데서 생긴 말입니다. 이때 규칙이 매우 복잡하고 흥미로운데, 일반 화투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흑싸리 피 한 장의 값을 일(一)로 계산하는데, 그 피 한 장이 게임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는데서 생긴 용어입니다. 이 말은 행복과 불행이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감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신앙 불신앙 여부를 떠나서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아주 작은 행복이라도 찾아낸 사람을 일컬으며, 반대로 불행한 사람이란 자신의 삶에서 오직 불행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행과 불행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영국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꾸는 1등 공신이었던 크롬웰 장군이 공화정을 실천하려니까 너무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때, 언덕에서 내려다 본 한 농가의 타작마당이 눈에 들어왔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두 노인네들이 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일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뭐가 그리 즐거우시냐?” 물으니, “크롬웰 장군 같은 분이 나라는 다스리게 되어 너무 행복하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역할과 수고가 중요함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았다 합니다.
시대는 바뀌고 많은 것들이 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가르쳐야 하고 고쳐야 할 것들이 넘쳐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수천 년간 악습과 폐습으로 찌든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켜야 할 과제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과제들 중에서 첫째 교회가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 낭비하는 경우를 들었습니다(3-5절). 세상 문제를 다 해결하겠다는 당찬 목적을 내세우며 사회적인 모든 병폐를 설교단으로 가져오는 경우입니다. 교회는 건전한 말씀을 가르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말입니다. 둘째는 신앙생활을 행복의 지름길로 여기는 현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6-10절). 기독교 신앙의 근본 목적은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구주가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해야 행복하다고 가르치는 민간신앙이나 변질된 일반 종교를 닮게 된 것입니다. 한 때 우리 교회는 20가지가 넘는 감사헌금 목록이 있었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에 대해 무관심한 교우들로 하여금 교회의 관심사를 제시함으로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선교헌금이니 구제헌금이나 재난 후원금이니 하는 명목의 헌금 목록 말입니다. 이 모든 헌금과 활동들은 행복을 보장하는 지름길로 여기게 만든 교회지도자들의 농간이 크게 한몫했음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은 순간적 만족에 불과한 세속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영적인 삶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다시금 깨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3. 어제는 기도하던 단비도 내리고, 사흘 전 캐나다에 사는 막내 딸과 자녀들이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 어제 보건소에서 PCR 검사 후 음성판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