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게 하는 도구. / 갈 3:15-22.
묵상자료 7715호(2022. 7. 1. 금요일).
시편 시 83:9-12.
찬송 34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등산 좋아하시는 분들의 추억 속에는, 여름 산행 중에서 만나는 장마의 경험이 있다고 하네요. 더 이상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상황, 그런 당황스런 순간에 산의 진짜 모습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산이 얼마나 거대한지, 그에 비해서 사람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한 산악인은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오도 가도 못할 상황인데 눈에 띈 야생초 한 무더기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 순간 자신의 위험한 처지를 잃어버린 경험을 이야기하더군요. 복병처럼 만난 산의 맨 얼굴에 매료된 사람들, 글쎄요. 오늘 하루도 어디선가 여름 산행을 즐기시는 분계시겠지요. 우연히 산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하루를 보내신 분도 계실 겁니다. 여름 산행 중 만나는 장마처럼, 숨겨져 있지만 찾으려는 사람에게 보이는 아름다움과, 왠지 모를 신비한 매력, 하나라도 더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7월 1일 방송>
2. “율법과 약속(15-22절)”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 수 있고 알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우리 인류가 낙원에서 불순종으로 타락한 다음에 곧 바로 시작되었습니다(창 3:15-21).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이 구원의 예표가 되었고, 구체적으로 몸을 가리는 가죽 옷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선사시대를 지나서(창 11장까지), 역사시대의 출발점인 아브라함 시대부터 새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중요한 단어가 약속입니다. 선민의 대표격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큰 민족을 이루는 것과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창 12:1-3).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큰 민족이란 온 세상을 지칭하고, 복을 받고 누린다는 것은 구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삶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약속이란 미래적인 것이고 희망의 정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약속을 이루기까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율법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약속이 먼저이고 율법이 그 다음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부단히 율법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약속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도 분명히 역할 분담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21-22절). 약속과 율법은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율법은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을 수 있도록 힘쓰게 하는 것이지만, 죄 아래 살고 있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고,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율법과 약속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이방적인 영지주의자들 역시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어리석게도 철저한 율법준수를 강조하였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위선입니다. 그런가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성령에 인도되어 세례를 받는 순간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육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동안은 죄를 벗어던질 수가 없습니다. 죄와 동행하며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비록 죄와 동거하며 살지라도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살고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마지막 죄의 멍에를 벗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롬 2:1-11). 바울 신학에서 가르치는 흥미진진한 관용구가 있습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이 그 말입니다. Oscar Cullman이라는 독일 신학자의 책 <Christ and Time>에서 언급한 용어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