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없는 빌닷의 충고 / 욥 8:1-10, 20-22.
묵상자료 7798호(2022. 9. 22. 목요일).
시편 시 100:4-5.
찬송 37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한 신문의 설문 조사를 보니까, 휴일이 끼어 있어서 꽤 긴 명절 연휴인데도 불구하고 일 때문에, 아니면 다른 사정 때문에 고향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약 250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웃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 교통 체증이라던가 명절 음식 준비는 배부른 투정이 될 수도 있겠지요. 고 운산 시, 최 영섭 곡 <망향> 준비했습니다. 가고 싶어도 고향 땅을 찾을 수 없는 분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해서요. 고향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가슴 저리게 아픈 망향가지만, 서글픈 타령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그러한 평을 받고 있습니다.
“저 산 너머 흰 구름 아래, 내 고향 있을 듯싶어. 영영 기다려 지친 몸 가녀린 손길에. 그대의 가슴 깊이 안기고 싶소이다. 푸르른 풀밭에 안기어서 봄을 노래하던 그 때가 그리워. 진정 내 가슴이 아프오. 저 산 너머 흰 구름 아래, 내 고향 있을 듯 싶어. 영영 기다려 지친 몸 이제는 잊었나. 돌아올 이 내 몸을 잊어 버렸나. 정답게 뛰어 놀던 그 때 그리워 쳐다본 하늘에, 말없이 어둠이 짙어지나 눈물만 흐르네.”
고 운산 시 최 영섭 곡 <망향>, 1951년 4월 한국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 피난시절 길거리에서 즉흥적으로 그리움이 사무쳐 만든 곡이라고 합니다. 고 운산은 최 영섭 선생의 아호입니다. 최 영섭 선생의 제1회 작곡 발표회에서 공개된 작품이고요. 망향 이 곡의 극적 구성이 눈에 띄는 스케일이 큰 곡이지요. 화려하면서도 애틋한 망향의 정을 더욱 더 깊게 만듭니다. 고음이 많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우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부드럽고 균형 잡힌 멜로디가 곡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망향의 정을 사무치게 노래하고 있는 노래를 들으셨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9월 22일 방송>
2. “빌닷의 첫 번째 충고(1-10, 20-22절)”을 읽었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등장합니다. 그는 욥의 친구로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와 같은 옛 도덕과 전통에 밝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빌닷은 한국에서 사업하는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 마디를 욥을 통해 남겼다고 합니다. 이른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7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서공회에서 총무로 일하셨던 민 영진교수는 <성경 바로 읽기>라는 책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고 낯선 해석을 했는데, 저 역시도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는 덕담으로 적극 추천할 수 있는 말이지만, 본문의 실제 배경에서 해석한다면, 일종의 비아냥거림이고 직접 청자인 당사자 욥에게는 저주하는 말로 들렸을 것이 분명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역사적 해석을 기피하고 문자주의에 빠진 시대착오적인 성경 해석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차제에 성경구절로 가득 채운 기도나,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하는 설교는, 대체로 기도자나 설교자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뒷받침하는 증명자료(froof text)로 성경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문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경말씀은 그 자체로 특별한 시대 배경과 대상과 목적을 가진 그래서 해석이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빌닷의 충고는 공 맹자의 가르침에 익숙한 우리 한국교회에는 쉽게 이해되는 내용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빌닷을 도덕주의자 또는 전통주의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서는 윤리가 최고의 기준으로 여기는 때문입니다. 빌닷은 욥의 자녀들의 죽음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죗값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떳떳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930년대로부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강단에서는 공 맹자가 단골 메뉴로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목사 초년시절에 많이 참고했던 <설교사전>이라는 두툼한 책이 있었는데, 그 책에서는 공 맹자의 가르침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닷은 아예 대놓고 옛 어른과 선조들의 말을 찾아보라고 권합니다(8-10절).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가르침과 비슷한 자리에 올려놓고 있음이 분명합니다(20-22절). 그러나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신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이해하고 감사하기에는(요 3:16), 인간의 도덕과 윤리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