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욥의 당당함은 확고된 신앙 때문. / 욥 10:1-9, 16-22.

박성완 2022. 9. 24. 00:00

묵상자료 7800(2022. 9. 24. 토요일).

시편 시 101:4-5.

찬송 51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갈수 없는 가지 못하는 고향을 둔 사람의 그리움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고향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는 사뭇 다르지요. 우리 가곡을 살펴보면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가서 행복하게 조우하는 그러한 노래는 없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그래서 쓸쓸한 마음을 달래거나, 막상 고향을 찾아갔지만 그립던 옛 고향은 아니라는 비애가 담겨진 곡이 있지요. 우리 가곡이 그리움과 유독 어울리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현제명 작사 작곡 <고향생각> 역시 고향을 그리는 허전한 마음이 쓸쓸하게 전해져 오는 그러한 곡입니다.

    “해는 져서 어두운 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 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마음 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리.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 가건만, 단 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이하리.”

   고향하늘을 그리면서 느끼는 외로움을 노래한 시입니다. 작곡가가 미국 유학시절 작사 작곡한 곡입니다. 1922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고향의 산천, 돌아간다고 해도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조국의 땅을 생각하면서 즉흥적으로 써내려 갔다고 합니다. 멜로디의 진행이 단조롭고 담담하지만, 적막함 속에 그윽한 아름다움이 감도는 곡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924일 방송>

 

2. “욥의 기도(2-10, 16-22)”을 읽었습니다. 욥은 숨 쉬는 일마저 너무 힘들어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기도는 한 개인이 자신이 겪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바라는 울부짖는 외침이 아니라, 우리들 인류를 대표해서 악마를 척결하지 않고 오히려 감싸주고 부추기는 듯한 하나님을 향해 억울함을 분출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그래서 조목조목 따지듯 묻습니다. 첫째, 자신을 죄인 다루듯 하지 말라고 항변합니다. 둘째, 시련을 주시는 까닭을 밝히라고 묻습니다. 셋째, 당신의 창조물을 괴롭히는 것이 기쁘냐고 따집니다. 넷째, 하나님은 사람보다는 더 잘 보셔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이시란 분이 인간의 허물이나 들추시는 분이시냐고 묻습니다. 여섯째, 자신이 죄인 아님을 아시면서도 고통을 주시는 것은 무슨 변심이냐고 따집니다. 일곱째, 결국 인간을 흙으로 다시 보내는 것으로 창조주다운 역할이냐고 묻습니다. 이런 욥의 기도를 들으면서 어떻게 이런 망발 혹은 막말을 할 수 있느냐고 분노하실 분이 계실 것을 예상합니다. 첫 말투부터가 그렇다고 말입니다. “죄인 다루듯 말라.”, “자신이 죄인 아님을 아시고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구절이야말로 우리들 크리스천이 깊이 곱씹어봐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약시대를 통과한 우리들은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대접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이라 확신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의 짐을 다 옮기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욥이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 받은 죄인들을 사랑의 눈으로 주목해 보신다는 것을 그는 일찍 깨달았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 취급하지 말라고 항변한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다음 구절을 읽자면 속 터지는 욥의 심장을 충분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사자처럼 나에게 달려드시며”, “군대를 풀어 몰아치시며”, “어찌하여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으, “잠간만이라도 밝은 날을 보게도 못하시며, “칠흑 같은 빛의 구실을 하는 곳으로가게 하느냐고, 마치 하나님을 정신 차리라고 하는 듯 외치고 있습니다. 저는 평생 하루 2시간 이상을 눈물로 기도하신 분을 보았습니다. 짧은 밤 또는 긴 밤을 가리지 않고, 새벽기도 30분 전에 초종을 그리고 5시에 재종을 치는 판잣집 교회당의 종지기로 사셨던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새벽기도의 풍경을 보았습니다. 일부종사, 남존여비, 칠거지악의 율법에 묶여 살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남편과 철부지 아홉 남매를 돌보며 논과 밭 그리고 산으로 숨 가쁘게 뛰어다녔던 가난한 여인의 삶을 온 몸으로 살아냈던 분입니다. 그런 삶이 얼마나 억울하고 괴롭고 한스러웠을까요? 철부지 아들은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는 다른 사람들보다 기도를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냐?” “아니란다. 아침밥을 누가 지어준다면 나는 더 엎드려 기도하고 싶다.” 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욥의 심정을 십이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울면서도 당당하게 하나님께 직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도 같은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저를 죄인 다루듯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사람들처럼 그리 속좁게 허물이나 들추십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