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 한 말, “하나님은 그런 분이신걸요.” / 욥 32:1-10, 19-33:1.
묵상자료 7809호(2022. 10. 3. 월요일).
시편 시 102:26-28.
찬송 8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향림 시 최영섭 곡 <해 뜨는 나라의 아침>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한 국경에 듣기에 좋은 곡이 아닐까 싶은데요. 힘차고 호탕한 정서를 맛볼 수 있는 힘이 넘치는 곡입니다.
“해 뜨는 나라의 아침이 열렸다. 저 산맥을 넘어오는 바람 소리에, 아침이 온다. 오, 빛나는 아침. 아침이 온다. 오, 빛나는 아침, 해와 바람과 강과 산이 한데 어울려, 춤추는 저 소리. 행군의 아침, 아침이 온다. 새소리 들리는 아침, 새벽 언제나 돌아와 우리를 품고, 오, 찰락이는 동해의 아침 햇살 위로, 무궁한 역사, 아, 무궁하고 무궁하리. 유구한 역사 아, 무궁하리.”
KBS 신작가곡으로 위촉된 곡입니다. 시인은 우리 가곡이 전반적으로 애조를 띈 것 같아서, 밝은 노래를 만들고 싶어 이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시로 된 가곡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할 정도로 애착을 갖고 있는 곡이지요. 작곡가 역시 가사의 분위기에 충실해서 밝고 힘찬 선율로 곡을 이끌어 갔다고 합니다. 우리 미래 역시 해 뜨는 아침처럼, 밝고 희망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들어 본 곡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10월 3일 방송>
2. “엘리후의 충고(32:1-10, 19-33:1)”를 읽었습니다. 성구집에서 안내하는 대로 따르는 중인데, 왜 갑자기 여러 장을 건너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상상력을 발휘해서 말씀드리자면 욥과 그의 세 친구 간에 주고받은 대화에서 답답해하는 마지막 욥의 젊은 친구 엘리후를 등장시키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엘리후는 욥기에 4번 등장하는 욥의 친구라고 소개하고 있을 뿐 다른 정보는 없습니다. 물론 엘리후 역시 욥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모양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욥에게는 충고자가 아니라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의 충고나 대화 내용에 불만이 많았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욥기서의 기자의 판단으로는 욥에 대한 엘리후의 기본적인 생각은, 하나님보다 욥 자신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엄청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한 마디 해 주고 싶었던 것을 밝힙니다. 비록 자신이 인생 공부가 일천한 풋내기로 말하면서도 그들 모두가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전부를 비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옳다 말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있어선 안 되는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런 욥과 그의 친구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계실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들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제대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언제나 코끼리 다리나 만지는 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우리 인간은 달랐습니다. 엘리후나 욥의 세 친구들 역시 이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어느 오후 문득 제 자신의 역사를 쭈욱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비교적 모범생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건 교회에서건 그리고 학교에서건 말썽꾸러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옛 흔적에 불과하다고 책상 맨 밑 서랍에 묶어 두었던 상장을 펴 보니까 유독 선행상장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많은 비행(非行)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그 속에는 호기심에서 저지른 일도, 객기를 부리고 싶은 영웅심도 보였습니다. 충분히 변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입 밖으로 삐져나오는 순간, 결코 가벼운 얘기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곤 이내 하나님께서 이런 저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를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는 수 천 수 만 가지의 사건과 사고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비율로 따져본다면 나쁜 놈 항목이 좋은 놈 항목 보다는 압도적으로 많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리곤 우리들을 붙잡고 있는 나쁜 놈 항목을 하나하나 지워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좋은 놈 항목만을 셈하시며 그걸 높여주시고 계셨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이란 바로 그런 분이신 것을 욥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욥의 마음으로 이웃들을 바라보려고 힘써야 옳겠다 싶습니다. 우린 누군가를 용서할 처지도 자격도 없습니다. 다만 비난하지고 나무라지도 않아야 하겠다는 뜻입니다.
3. 개천절입니다. 홍익인간을 국시(國是)로 나라를 열었다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