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절을 기억해야 할 이유. / 에 8:1-8, 15-17.
묵상자료 7827호(2022. 10. 21. 금요일).
시편 시 105:1-3.
찬송 53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가지이다. 조용한 방에 틀어 박혀서 휴식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머리 아프게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철학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라고해도 좋습니다만, 주말의 시간 보내는 계획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등산이나 놀이공원 고속도로 어디를 가건, 주말에는 사람들로 늘 가득 차 있고, 곧 길을 나선 걸 후회하게 되지요. 굳이 먼 곳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곳의 한 적한 시골마을 같은데서, 천천히 산책도 하고, 한 동안 구름이 흘러가는 것도 보면서, 한 마디로 느림의 미학을 체득하고 오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은 데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10월 21일 방송>
2. “유대인들에게 살 길이 열리다(1-8, 15-17절)”을 읽었습니다. 가난을 대물림 받은 사람들은 무슨 낙으로 살아갈까요? 제가 목회를 시작하던 부산 개금동은 산 밑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 밑으로 휑하니 빈자리가 있었는데, 군인부대가 있었던 자리로 막 옮겨가고 저의 교회가 그 군인부대 아랫자락에 터를 구했는데, 제가 그곳에서 3년 6개월 목회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산 밑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술에 취한 두 세 사람은 그 비탈길 가에 드러누워 있곤 했습니다. 살아가는 재미도 희망도 없다고 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 믿음 하나 라는 뜻의 신일 교회를 개척한 것입니다. 교회가 꼭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 헌당식도 갖지 않는 작은 교회당에서 “젊은이들아,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라는 주제로 첫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가슴만 불탔을 뿐 그들을 끌어 안아주기에는 품이 넓지 못했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일터로 학교로 가는 주민들에게 전도지를 전하고, 제가 직접 써서 프린트한 신앙편지를 매주 한 통씩 100가정에 13주간 보냈습니다. 매주 노인정 두 곳을 돌면서 마을봉사대를 만들어 생활지도를 하자고 권했습니다. 아내는 유치원을 열어 20여명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성인 전도는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주일 학생들이 수십명 가르칠 수 있어서 작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실패한 젊은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셨고, 첫 설을 맞는 저의 집에 설빔을 차려온 천사 한 분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 답답하고 힘든 시절에, <성서 백과 대사전> 12권을 공부한 것이었습니다.
사는 길이 있다면 누군들 그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 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나 노력으로 벗어던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노예로 잡혀 온 사람들, 전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그러나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따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소설로도 꾸며 쓰기도 어려운 그런 주인공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달월(2-3월) 14-15일은 유대 민족이 한 날 한 시에 개처럼 끌려가 죽임을 당할 비극의 날이었는데, 바로 이 날이 그들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나게 된 날이 된 것입니다. 하만의 음모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하만을 대신해서 모르드개가 자줏빛 옷감과 흰 옷감으로 만든 궁중 예복을 입고 금관을 쓰고 어전에서 나올 때, 온 수산성이 환성을 올렸습니다. 왕의 어명으로 이 날을 축일로 삼고 잔치를 벌였으며, 유대인들은 이 날을 부림절이라고 명명하고 3대 명절에 하나를 더해 특별한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부림절의 모든 과정 속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내용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엘리야의 하나님을 찾는 기도를 많이 드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하나님을 엘리야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Margaret Fishback Powers의 <발자국/Footprints> 이란 시도 떠오릅니다. 요약하면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늘 동행하시겠다더니, 그런데 제가 가장 외롭고 힘들 땐 어딜 가셔서 저 홀로 걷게 하셨습니까? 바로 그 때 내가 널 업고 가고 있었단다.” 이런 내용입니다. 주님의 음성조차 들리지 않는 그런 때는 사실은 주님이 우릴 업고 계셨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