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율법은 그 제정 정신에서 해석해야. / 눅 6:1-11.
묵상자료 7833호(2022. 10. 27. 목요일).
시편 시 105:20-22.
찬송 5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명한 시인, 작곡가, 화가들의 작품 속에 많이 등장하는 주제,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사랑, 이별, 그리움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요. 좋은 예술 작품을 위해서 홀로 많은 시간을 싸우며 보내야 했기에, 그들의 작품 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이를 그리게 되고 함께 있지 못함을 탄식하는 고독과 그리움이 담길 수밖에는 없었겠지요. 우리 가곡 중에도 <그리움>이라는 제목을 지닌 곡이, 작곡가 홍난파 이수인, 이은자, 조두남 등의 작품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작곡가 조두남의 <그리움> 함께 하시겠습니다.
“기약 없이 떠나가는 그대를 그리며 먼 산위에 흰 구름만 말없이 바라본다.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오늘도 해는 서산에 걸려 노을만 붉게 타네. 귀뚜라미 우는 밤에 언덕을 오르면 초승달도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린다.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이 밤도 나는 그대를 찾아 어둔 길 달려가네.”
노랫말과 곡이 남긴 여운에 가슴이 아련해 집니다. 조두남은 <선구자>, <제비>의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지요.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만, 일제 강점기, 고향인 평양을 떠나서 만주 하얼빈 인근에서 방랑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움>은 바로 그 만주 시절에 작곡 된 곡입니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조두남이 제2의 고향이라 부르는 마산에 정착해 계속 작품 활동을 하게 되면서 시인 고진숙을 만나게 되지요. 고진숙은 “아, 봉선화야, 봉선화야, 눈물을 씻고, 힘차게 살자 봉숭아야” 이렇게 되어있던 노래의 가사를 “기약 없이 떠나가신” 으로 시작하는 지금의 노랫말로 개사를 권합니다. 지금의 노랫말로 고친 뒤에 <그리움>은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지요. 노랫말에서 고향을 등지고 고된 타향살이를 하게 된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10월 27일 방송>
2. “안식일의 주인(1-5절)”과 “오그라든 손을 펴 주신 예수(6-11절)”을 읽었습니다. 두 본문 모두 안식일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점에서 첫 단락의 주제를 따라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 중에는 안식일(혹은 주일)을 지키는 문제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그분들에게 지도를 받은 교우들은 대체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문자적인 이해는 성경의 말씀이 처음 들려졌던 청중이나, 그 말씀을 처음 읽었던 사람들로부터 수천 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적인 간격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기 쉽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목사님들은 신학교에서 성경의 시대적 배경을 공부합니다. 성경 시대의 중동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특히 십계명과 같은 엄격한 율법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하게 이런 시대적 배경 연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이나, 남아선호사상,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듯한 말씀들, 가나안에 대한 집착 등과 같은 문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은 우리들과 다른 문화적 배경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와 다른 문화를 좋다 나쁘다 말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문화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바꾸어지는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이해와 받아들임이 있은 후에 서서히 변화될 것을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안식일이라는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일신 사상을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철저하게 무장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써, 하루에도 수 십 수백 번씩 쉐마를 되풀이 외우는 삶을 살고 있었던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풍토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보존하는 가장 효과적인 신앙적 가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안식일을 지키는 신앙은 오랫동안 오해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너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오해이기도 합니다. 그 오해란 안식일의 제정 정신보다는 안식일을 지키는 관행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쉬신 날이라는 축복의 의미보다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형식적 의미 혹은 문자적 의미가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다가 시장해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먹은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본 바리새파 사람 몇 명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비난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 따져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사를 인용하셨는데,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안식일에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지성소에서 물려나온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예로 드셨습니다. 안식일 전날 지성소에 진열되어 있는 72개의 떡 덩이(진설병)를 교환하고 나온 헌 진설병을 다윗은 요구했고, 군사들에게 먹인 것입니다. 이렇듯 안식일의 율법을 비롯하여 모든 율법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려는 뜻을 가졌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