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해 최선의 길을 찾은 청지기. / 눅 16:1-9.
묵상자료 7848호(2022. 11. 11. 금요일).
시편 시 106:23-25.
찬송 44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문학 작품을 다른 문화권의 독자들에게 선보일 때 가장 어려운 것은 표현의 문제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예술 작품에는 한이나 정처럼 외국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국민 특유의 정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한과 정의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문학작품으로, 우리가 흔히 김소월의 시를 꼽습니다.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서정성과 애상어린 시어, 누구나 그리워하는 향토적인 소재가 담긴 그의 시는, 그래서 우리 가곡의 노랫말로 자주 쓰여 왔지요. 소개해 드릴 <접동새> 역시 김소월 시에 이호섭이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접동 접동 아 울 오라비 접동,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 쪽에 살던 진두강 가람 가에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 부르다 서러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접동. 아홉이나 남아 있는 동생들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산 저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접동, 접동, 접동.”
우리 가곡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흔히 애조 띤 선율과 서정적인 노랫말을 꼽곤 하지요. 김소월의 시에 이호섭이 곡을 붙인 이 곡 <접동새>야 말로 그러한 특징을 잘 나타낸 작품입니다. 의붓어머니의 시샘 때문에 죽은 누이가, 남은 아홉 동생을 염려한 나머지 접동새로 환생해 밤마다 찾아왔다는 접동새 설화. 김소월은 접동새 설화를 이 시 <접동새>에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작곡가 이호섭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듣던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이게 됐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곡이 나아가야할 음악적 방향을 제시한 예술 가곡 중의 한 곡으로 평가받는 작품 <접동새>, 판소리를 듣는 것 같은 이색적인 곡조가 인상적이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11월 10일 방송>
2. “약은 청지기 비유(1-9절)”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이해하려하거나 해석하려는 경향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그런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중요한 집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들리더니 급기야는 주인의 귀에 까지 들려서, 주인은 그 청지기를 해고하기로 하고 소문을 확인시킨 후 그의 업무를 정산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약은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기름 백말을 진 사람에게는 오십 말로, 밀 백 섬을 빚진 사람에게도 팔십 섬이라고 차용증서를 고쳐 쓰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청지기의 처신을 보고 주님께서는 칭찬하셨는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있어서 지혜로웠고, 없어질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귄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동안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해석으로, 이 청지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못된 일만 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일은 물론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려고 장부를 허위로 꾸몄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이런 해석의 초점은 청지기의 부정직한 행동이나 처신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다는 것은 칭찬받을 만 한 일이라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채무자들이 적어냈던 빚의 총합은 이자를 포함한 액수였는데, 이자는 청지기의 몫이었는데, 이 약은 청지기는 자기 몫을 손해 보는 길을 택함으로,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채무자들에게는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의 약점은 뒷받침할 증거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표제어가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오랫동안 이 말씀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는 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청지기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청지기는 바로 우리 자신들을 대입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처럼 현세적 심판에서 낙제점수를 받게 되었을 때,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청지기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첫째는 그는 희망이 없는 사람으로 주저앉지 않고, 최선의 길을 찾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는데, 비록 주인의 재산을 더욱 더 축내는 일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에게 돌아올 이자를 포기했든지 간에, 채무자들의 어깨에 있는 짐을 덜어주는 길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 청지기는 주인에 대한 믿음, 곧 청지기로써 자신의 주인이 자신과 채무자들을 긍휼로 감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칭찬한 이유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