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인격적인 전도만이 사람을 살린다. / 눅 19:41-48.

박성완 2022. 11. 26. 00:00

묵상자료 7863(2022. 11. 26. 토요일).

시편 시 107:23-25.

찬송 26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무수히 많은 시간들 속에서, 어떤 순간은 마치 암호처럼 마음 속 깊은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 내기도 합니다. 낙엽을 주워 책 사이에 끼우는 누군가를 봤을 때, 혹은 커피에 설탕을 한 스푼만 넣는 사람을 봤을 때, 아니면 오래전 누군가와 함께 듣던 음악을 다시 들은 순간일 수도 있겠지요. 갑자기 멍해지고 아득해 지면서 마치 옛날 그 당시 그 어느 순간으로 돌아간 듯 한 그런 기분 말입니다. 이제 소개해 드릴 곡을 듣고서 여러분은 어떤 분을 떠 올릴지 궁금해집니다. 신봉석 시 신귀복 곡 <얼굴>입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 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 나래. 구름 속의 나비처럼, 날으던 지난 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곤 하는 얼굴.”

    서울 마포의 한 중학교 교무실, 구석자리에 있던 음악교사 신귀복은 평소보다 길어진 교무회의 중에, 옆에 앉은 생물교사 심봉석에게 엉뚱한 제안을 하나 하게 됩니다. 얼굴이라는 주제로 곡을 만들 테니까 연인을 떠올리며 노랫말을 한번 써 보라는 거였지요. 마침 신봉석은 어렵지 않게 노랫말을 써 주었고, 신귀복 역시 즉석에서 곡을 붙이게 됩니다. 당시 라디오 노래 프로그램의 노래 경연대회의 심사 위원이었던 신귀복은 정식으로 곡을 대중에게 선보이기에 앞서 대회 참가자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고, 방송이 나간 후에 악보를 보내달라는 편지들이 쇄도 했다고 합니다. 1970[신귀복 가곡집]이라는 음반을 통해서 소프라노 홍순미 목소리로 공식적인 첫 선을 보입니다만,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건 이후 윤연선이 가요로 발표한 이후였습니다. 곱고 단아한 곡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1126일 방송>

 

2. “예루살렘의 불행(41-44)”, “성전 뜰에서 쫓겨난 상인들(45-46)”예수를 죽이려는 자들(47-48)”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예수님이 방문하신 예루살렘 성전은 장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요란법석을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에 쓰일 제물들인 어린 송아지나 양과 염소 비둘기 등은 물론, 성전세를 바치기 위해서 일반 동전을 반세겔로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이 상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호객행위와 거래하는 과정을 상상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바라보신 주님은 강도의 소굴로 표현하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바뀐 것이냐고 질문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성전이든 어디든 인간이 이해득실을 따지는 곳에서는 시장통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면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실까요? 제가 1994년부터 2015년까지 지방 교회를 순방하며 목사를 위한 성경 강습회를 약 300 여회 강의한 일이 있었는데, 제 눈에 비친 중견급 이상의 교회들은 강도의 소굴이라는 말을 들을 만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이 작게는 3회 많게는 7-8회 있었는데 반해서, 교회가 운영하는 각종 친교, 재능, 봉사, 정보교환, 기타 프로그램들이 엄청 많았고, 그 일만을 전담하는 목사님도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강사를 교섭하고 학생을 모집하는 등등 할 일이 꽤나 많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에 오는 교우들은 예배보다는 그 프로그램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업가 모임이나 법조인 모임, 그리고 일반 학교교사 모임 등도 활기가 넘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작은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재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며, 전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말했습니다.

    1970년대에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미국 사회학자 사울 알렌스키의 영향을 받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 는 급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대안을 얻었는데, 폭력에 의한 수직적 사회변혁이 아니라, 실용주의 전통에서 강조해온 참여 민주주의의 원리인 수평적 구조를 택하도록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목적과 수단의 관계는 교회의 선교와 성장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성장주의에 빠진 나머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선교 대상인 사회를 피로하게 만듦으로, 안티 크리스천을 양산해 온 것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다다익선이니 선 성장 후분배 식의 사회 정치 논리가 사랑과 섬김 그리고 인격을 바탕으로 하는 신앙세계에서도 통할 것이라는 시행착오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1:8)을 인격적인 복음전파와(16:14-15) 불일치하는 말씀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자신의 당대에 열매를 거두려는 꿈을 나쁘다 말할 수는 없어도, 좀 더 긴 호흡을 가지고 역사를 보았다면,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4:36-37)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