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살 기회를 날려버린 어리석은 소작인들. / 눅 20:9-19.
묵상자료 7866호(2022. 11. 29. 화요일).
시편 시 107:33-35.
찬송 30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긴 친분을 가지지는 않았어도, 서로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말은 나누지 않아도, 그 쓸쓸함과 여운은 잠시 마주한 눈빛 속에서 전해져 오지요. 그래서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을 한 눈에 서로들 알아본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가곡 <언덕에서>의 작곡가 김원호와 노랫말을 지은 민영식 역시 그랬지요. 비슷한 시기에 이룰 수 있는 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두 청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곳이 언덕에서지요. 다정다감하면서도 쓸쓸함이 느껴지는 이 곡의 정서는 두 청년의 실연의 아픔을 공감대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저 산 너머 물 건너 파랑잎새 꽃잎은, 눈물짓는 물망초. 행여나 오시나 기다리는 언덕에, 님도 꿈도 아득한 풀잎의 이슬방울. 온 종일 기다리는 가여운 응시는, 나를 나를 잊지 마오.”
부산 사범대학교 음악과 1학년생이었던 민영식은 오랜 지우인 김원호와 함께 모교인 평화 고등학교 뒷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랑했던 여인이 다른 사람과 결혼했던 상처를 가지고 있던 민영식은, 그 안타까운 마음을 <물망초>라는 시에 담았고, 역시 부모의 반대로 헤어진 여인을 잊지 못하고 있던 김원호 역시 시를 읽고 서로 공감을 나누게 되지요. 후에 비록 곡의 제목이 바뀌었습니다만, 방금 들으신 언덕에서는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상처로 되돌아온 두 청년의 비애와 서정이 담긴 곡입니다. 우리가 장르에 음악에 공감을 하고 위로를 받는 이유 역시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11월 29일 방송>
2.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9-19절)”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을 얘기꾼이라고 부르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던 세계적인 대문호 셰익스피어나, 러시아가 자랑하는 톨스토이가 극찬한 스토리텔러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비유를 창작하신 것은 그 대표적 예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포도원 주인과 소작인의 이야기인데, 여러 가지로 함축된 의미가 깊다하겠습니다. 포도원을 만든 주인이 오랫동안 집을 비우면서 자신의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맡기고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종종 일어나는 낯설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작인들에게는 매우 귀한 기회가 온 것입니다. 시키는 일만 하던 노예와 같은 삶이 아니라, 자신들이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실행하면서 자신들의 재능을 시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말입니다. 주인은 매년 포도 철이 되면 소작인들에게 도조를 요구한 것입니다. 남의 땅을 사용할 경우에 지불하기로 약속한 사용료를 말합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행동한 것입니다. 첫해는 도조(사용료)를 받으러 온 주인의 대리인을 때려서 빈손으로 돌려보냈고, 다음 해는 때릴 뿐 아니라 모욕까지 주어 빈손으로 돌려보냈으며 셋째 해는 상처를 입히고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넷째 해에는 주인의 아들을 보냈는데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아주 빼앗을 생각으로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무법천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 주인은 날강도 같은 소작인들에게 자신의 포도원을 빼앗기고 말 것입니까? 포도원 주인은 돌아와서 그 악한 소작인들을 다 죽여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포도원을 맡기게 될 것이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사장과 율법사들은 그건 너무한 일이 아니냐며 항의하였습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질러 놓고 그 책임을 묻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운운하며 빠져나가려는 사람들 말입니다. 철부지 아이들처럼 미처 알지 못해서 실수를 했다거나, 큰 문제는 아니라고 가볍게 생각했다고 하면, 이는 바보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어느 대교단 총회와 재판국에서 벌어진 갑론을박을 보면서, 사건의 실체보다는 과정의 자비 없음을 새로운 사건화 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본문과 닮았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하신 비유 <모퉁이의 머릿돌> 비유는 정신을 빠짝 차리게 하는 결론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전문가로 자처하는 건축가들이 전혀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머리돌이 되었다는 그리스도론 적 의미를 가지는 말로, 사람들에게 배척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반드시 명예로운 자리에 서 있게 될 것이라는 심판의 성격을 가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향한 말씀으로 직감했습니다.
3. 김선도 목사님께서 93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