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부조화한 사람들의 결말. / 사 9:18-10:4.
묵상자료 7882호(2022. 12. 15. 목요일).
시편 시 110:1-3.
찬송 44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양의 작곡가들에 비해서 우리 작곡가들은 음악을 늦게 시작한 경우가 많습니다. 서양음악 자체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도 오래지 않았습니다만, 그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경로역시 신문물에 일찍 든 교사라든가, 교회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고작이었지요.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어린 나이에 음악을 시작한 이가 있습니다. 작곡가 나운영이지요. 그는 5살에 되던 해에 부친에게 받은 양금 교습으로,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음악적 기반은 음악가로써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국적인 음계와 서양 음악의 접목을 놓지 않았던 그의 음악성을 설명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오늘 나운영의 작품 중에서 <가려나> 소개해 드립니다.
“끝없는 구름길 어디를 향하고. 그대는 가려나 가려나. 가없는 바다의 외로운 배처럼. 어디로 뜨려나 뜨려나. 사랑의 스물은 덧없이 흐르고. 앞길은 멀어라 멀어라. 기쁨은 빠르고 설움을 끝없어. 마음만이 아파라. 아파라. 아파라.”
1940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 에 나운영의 기러기가 악보와 함께 발표됩니다. 동아일보가 현상 모집한 최초의 작곡모집에 당선된 거였지요. 신문에 상고머리에 교복 차림을 한 나운영의 사진이 실렸고, 사람들은 그의 앳된 모습에 놀랐습니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나운영은 중학시절부터 피아노와 작곡에 취미를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가려나>는 그가 17되던 해에 완성된 작품인 셈이지요. 김안서가 실연의 공허한 괴로움을 노래한 시를, 17세의 청년이 선택했던 것 자체가, 그의 감성이 조숙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담담한 선율의 진행 속에 진행되는 호소력이 인상적이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12월 15일 방송>
2. “에브라임을 벌하시는 야훼의 손2(18-10:4)”를 읽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가나안 정착 후 열 두 지파를 이루게 되었는데, 요셉 지파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편입되었는데, 이 둘은 요셉의 두 아들로 친 형제입니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했던 열 지파는 하나님의 진노로 동족상잔을 일으켜 서로를 상처주고 그도 모자라 살육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치고는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을 지켜보거나 스스로 겪을 때,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창세기에는 우리 인류의 시작과 함께 행복했던 시절과 그리고 밀어닥친 불행의 역사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인류의 타락과 저주의 시작을 말씀하는 기록들입니다. 창세기 11장까지를 선사시대(先史時代)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 이전의 시대는 다분히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특징이 우리 조상들의 수명(壽命)입니다. 창세기 5장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아담이 930세, 셋은 912세, 에녹은 살아서 승천하였는데 365세를 땅에서 살았고, 므두셀라는 969세, 노아는 950세, 아브라함이 175세, 모세가 120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과 3장은 매우 짧은 내용이긴 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점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관계였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고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 있는 거리두기인데, 하나님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갈 때라고 말씀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자기 포기)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제멋대로 생각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제 멋대로 사는 것이 참 자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허용되는 자유가 참된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넘어서는 길, 곧 불순종의 길을 걸어감으로 이때부터 불행의 시작, 곧 하나님과의 부조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불행은 인간 자신의 실수나 어리석음 또는 연약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자기 자신과도 부조화를 맛보게 되고, 다른 사람과도 그리고 자연과도 부조화를 이루며 살게 된 총체적인 난국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브라임이 겪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 역시 그들이 저지른 만행이 무엇인지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솔로몬 이후 남 북왕국으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북왕국도 찬란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평화로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시련과 고난의 시절이었습니다. 그 구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며 살 때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아들들로 태어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형제의 사랑이 깊은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과 부조화를 이루는 시대 배경 속에서 더욱 더 악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악법을 제정하고, 영세민을 학대하고, 과부와 고아를 등쳐먹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런 모든 악행은 하나님과의 부조화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