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을 왜 사랑하실까? / 엡 2:1-10.

박성완 2023. 1. 11. 00:00

묵상자료 7909(2023. 1. 11. 수요일).

시편 시 118:7-10.

찬송 4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해 문화계에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많았습니다. 세계 음악계의 거장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비롯해서, 문학계의 거목인 권정생 선생의 부음은, 많은 이들의 큰 상심을 가져다주었지요. 우리 가곡사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활동을 보였던 김순애 선생의 부음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순애 선생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 5월 작고한 문인 피천득과의 남다른 인연으로 또 한 번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지요. 피천득의 시에 김순애가 곡을 붙여 완성한 곡 <이슬>, 바로 이들의 소중한 인연이 담긴 작품입니다.

    “그리도 쉬이 스러져 버려, 어느 새 맺혔던 가도 하셔오리만, 풀잎에 반짝인 것은 이슬이오니. 지나 간 순간은 의심치 마소서. 고이 스러져 없어진 것을, 아무려 여기신들 어떠시련만, 그래도 그 순간이 가엾아오니, 지나간 기억은 의심치 마소서.”

    가난한 시와 곡의 분위기, 성악가의 음성이 만들어내는 조화가 인상적인 곡입니다. 1920년 황해도 안악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김순애는 이화여전에 작곡과가 생기자 은사였던 작곡가 김세영의 권유에 따라서 피아노에서 작곡으로 전공을 바꾸게 됩니다. 졸업 후에 미국유학생활을 귀국해, 모교인 이화여대에 30여년 가까이 몸담으면서 작곡가이자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지요. 김순애 선생은 60년간 작곡하면서 남긴 다양한 작품들 중에서 가곡으로는 피천득의 시에 붙인 곡들과, 조지훈의 <바람의 노래>를 가장 아꼈다고 합니다. <이슬><사랑>에 이어서 피천득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인데요. 피천득 선생을 자택으로 초청해 초연한 후, 직접 헌정한 곡입니다. 작곡가와 문인 피천득의 깊은 인연을 담고 있는 그러한 곡이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110일 방송>

 

2.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1-10)”을 읽었습니다. 우리 인류의 영원한 숙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죽음은 우리 인류 앞에 던져진 가장 크고 무거운 숙제임에 분명하니까 말입니다. 아무튼 어제도 오늘도 사람들은 열심히 건강식품을 먹고 유산소 운동이 절실하다며 걷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들에게 우리 인류가 그렇게 터부시하는 죽음의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는 자주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의 말씀들은 죽음이 어떻게 우리 인류를 삼켜버렸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였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죽음의 문제를 풀어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죄의 문제부터 눈뜨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죄라는 용어는 목표를 빗나가는 일이라는 하말티아(αμαρτια)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은 마귀를 탈을 쓴 흉악무도한 비인격적인 요괴가 아니었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 일이나,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존중하고 아껴주지 않는 것이 목표를 빗나간 것으로, 성경이 지적하는 죄라는 행위였습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도,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녀도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 세상에는 수도 헤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죄들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내랴?”(7:24)고 절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상할 수조차 없이 많은 죄들에 둘러싸여 압도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죄의 소굴에 갇혀 있는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주어진 현실을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풍쟁이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다.”고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하나 다를 바 없이 본능에 맡겨 육정에 끌려 살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에서 열까지 죄의 세력에 의해 살아날 기력이 전혀 보이지 않아, 죽어있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 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죽어있던 우리를 살려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은총이 아니고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은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 그 자체였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넘치고 넘치는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작품 중의 작품인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같은 은총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한 신학생이 질문하기를 어찌하여 하나님은 죄가운데서 죽어 가는 인간을 살리려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가?” 하였습니다. 그 대답은 아무리 보기 싫고 미워도 하나님의 사랑 가득한 눈 속에 있는 인간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식이니까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