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을 들고 깨달은 사도 바울. / 엡 3:1-13.

박성완 2023. 1. 13. 00:00

묵상자료 7911(2023. 1. 13. 금요일).

시편 시 118:14-16.

찬송 2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두남은 <선구자> <그리움> <제비>와 같은 곡을 통해서 사랑받아온 작곡가입니다.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의아들로 태어났습니다만 일제 강점기에 고향인 평양을 떠나서 만주 하얼빈 인근에서 방랑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에 시작된 한국전쟁으로 마산에서 피난 생활을 보내면서 30여년이 넘는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일찍 고향을 떠나온 그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그리운 이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곡들이 많았지요. 하지만 그러한 작품 중에서도 이례적인 곡이 있습니다. 바로 <뱃노래>인데요. 내 고향 내 조국을 떠나서 먼 이국땅에 있는 그에게, 조국의 독립은 눈물이 날 만큼 반가운 소식이었기에, 뛸 듯이 반가웠던 그 마음을 담아 만든 곡이었습니다.

    “푸른 하늘에 물새가 춤춘다. 에히야 데이야 어서 노저어라 님찾아 가자. 두둥실 배 띄워 청춘을 싣고서 여기는 황포강 노을이 붉고나. 에이야 데이야 어서 노 저어라, 님찾아 가자. 아득한 창파 만 리 님계신 곳 어디런가. 맑은 달빛이 물위에 춤춘다. 에히야 데야, 어서 노저 어라 고향에 가자. 순풍에 돛 달고 파도를 헤치고 바라다보면, 하늘도 멀고나 에이야 데이야 어서 노 저어라 고향에 가자. 아득한 수로만리 고향산천 어디런가.”

    흥이 느껴지는 리듬의 전개와 멜로디에서, 우리 민요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 뱃노래는 1946년 서울에서 조두남이 직접 시를 짓고 곡을 붙인 곡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작곡가가 그랬던 것처럼 작사자의 이름에는 자신의 아호인 석호를 넣었지요. 광복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북만주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작곡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민요의 소재를 이용해서, 가곡을 진정한 민족음악으로 재탄생 시키려는 작곡가 조두남의 음악적인 포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112일 방송>

 

2. “이방인을 위한 바울의 사도직(1-13)”을 읽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한 인간을 그리고 한 사회 공동체를 엄청난 변화의 길로, 요샛말로 혁신적인 삶으로 이끌 것입니다. 비록 깨달음은 한 순간일 수도 있고, 어떤 일정한 기간의 만남일 수도 있지만, 생각하는 방향을 바꾸거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대폭 수정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엄청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험을 치러 거창이라는 시골로 유학을 갔는데, 수험생을 앉혀둔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흑인 노예 부커티 워싱턴 커버의 이야기는 제 앞에 서광(曙光)이 비치는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흑인 노예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고, 그 이후로 제 삶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가르치시는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감격과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런 놀라운 깨달음을 갖게 되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을 계시해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본문에서 무려 여섯 차례나 심오한 계획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사도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깨달은 그 심오한 하나님의 계획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다인들과 함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6). 그런데 이 고백은 이미 창 12:1-3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가 엉뚱하게 지어낸 말이 아니라, 정통성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수신자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카이스테르 강어귀에 건설된 고대 도시로 풍요의 여신 <아데미>의 신전이 있고, 탑 같은 머리와 많은 유방을 가진 아데미 신상은 에베소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유명한 상품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우상의 도시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는 자신이 그들의 사도가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바울의 고백은 그가 살아온 유대적 배경에서는 매우 위험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고정관념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짐승과도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인데, 그들을 위해서 일꾼이 되겠다고 자청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선교사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선교사는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문화와 인습이라는 탈을 쓴 수많은 우상들과 대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몽골에 선교 여행 때 알게 된 사실은, 초기의 한국 선교사가 과격하게 가르친 때문에, 젊은 성도가 불교 사원에 불을 지름으로 사이가 나빠진 것입니다. 아무리 복음이 중요한 말씀이지만 그런 폭력적 방법으로 포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당장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 감화시키고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교육기관이나 고아원 그리고 병원을 세워서 선교지의 백성들을 섬긴 배경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