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참된 일치란 개체마다 자기 특성을 유지한 체 조화를 가진 연합. / 엡 4:1-16.

박성완 2023. 1. 16. 00:00

묵상자료 7914(2023. 1. 16. 월요일).

시편 시 118:23-25.

찬송 52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곡가 박찬석은 1922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서, 진안에서 소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전주 사범 재학 당시 만난 음악선생님의 영향으로, 훗날 경희음대에서 작곡을 전공을 하고, 음악교사이자 작곡가로써의 길을 들어서게 됐지요. 60여 편의 작품들 중에서 <낙엽>, <남촌>같은 작품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현대 기법이나, 전위적인 작곡방법을 부정하고, 건강하고 단정한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교육가이자 음악가인 사람의 사명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의 곡들은 소박하고 단아한 특징을 지니고 잇지요.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님의 노래> 역시, 그러한 그의 음악성이 잘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내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밖에서 서서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랫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내 잠은 포소고니 깊이 들어요. 그러다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어 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 말아요.”

    <봄이 오면>은 작곡한 것과 비슷한 시기인 1950년 후반 만들어진 곡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점점 밝아지지만, 더불어 오는 삶의 허전함은 누구도 위로해 주지 못한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지요. <님의 노래>는 바로 그런 시기 작곡가 박찬석이 문득 밀려오는 중년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자주 암송하던 소월의 시에 곡을 붙여 완성한 곡입니다. 소월의 <님의 노래>를 가곡으로 만들면서, 역시 소월의 작품인 <>의 한구절과도 일치하는 원문의 마지막 한 연이 생략 되어있지요. 우리 가곡계를 대변하는 원로 음악인들이 대부분 작고한 지금, 80대 중반을 넘은 그는 우리 음악계의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116일 방송>

 

2. “일치를 호소함(1-16)”을 읽었습니다. 저의 첫 목회지였던 부산에서 저는 선배 목사님의 권유로 신 구교 일치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서로 다른 교파 간 강단교류 만이 아니라, 성 금요일이면 일치회 회원 목사들과 신부들이 부산 시내를 행진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당시 동항 천주교회 주임 신부였던 독일인 하 안토니오 신부님이 떡메를 어깨에 메고 앞장을 서신 것입니다. 그리곤 저녁 예배 시간에 어느 회원교회에서 가상칠언(加上七言)을 본문으로 7명의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것으로 행사를 마치곤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1970년대 말에나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떡메는 교파들이 주장하는 온갖 주장과 교리들을 떡메로 쳐서 흔적도 없이 섞어 버리는 일이는 것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래서 훗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희망하고 힘쓸 일치란 모든 교파들이 가진 특징들을 다 떡메로 내리쳐서 알아볼 수 없도록 섞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아닌 것인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가 강조해 마지않는 주제는 하나가 되라는 권고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성령도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도 주님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님도 하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동안 이 말씀에 근거해서 앞서 소개해 드린 부산의 일치회처럼 시도하는 분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과연 사도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일치나 조화가 이런 의미일까 하고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런 일치를 위한 시도는 교파 사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역본에는 시리아 역본인 디아테사론이란 성경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의 내용이 서로 중복되기도 하고 조금씩 다르기도 해서 사람들의 혼란을 막겠다는 의도로, 4복음서를 연대기적으로 묶어 한 권으로 만든 것이 바로 Diatessaron 이었습니다. 훗날 이 디아테사론은 잘못된 번역서로 퇴출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한 설교자에게 수십 명이 설교를 들었는데, 들은 이마다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설교자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누군가가 한 가지 얘기로 종합을 하고 다른 얘기는 기억에서 지우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의 배경과 전 이해를 가지고 사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한 가지 내용과 의미만 주장하는 것은, 인간 이해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처사인 때문입니다. 사도는 참된 일치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11절 이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양한 역할과 임무를 맡기셨다고 말입니다. 사도나 예언자 전도자와 목자와 교사 그 밖에 봉사자 등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온 교회가 일사분란하게 제 구실을 하도록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