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율법의 아들이 아니라 약속의 아들을 지키신다. / 갈 4:21-31.
묵상자료 7930호(2023. 2. 1. 수요일).
시편 시 119:41-43.
찬송 48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야외에선 꽃을 보기 힘든 계절에, 눈밭을 헤치고 핀 매화나 동백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움을 논하기에 앞서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을 맞으면서도 초록 잎사귀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던 고고한 붉은 색의 동백꽃은, 수명이 다해서 질 때조차도 시들지 않은 꽃봉오리가 통째로 툭 떨어집니다. 꽃으로 피어 있을 때는 시드는 모습조차 보여주기 싫다는 듯이 말이지요. 바람이라도 불면 후드득 소리까지 내며 떨어지던 붉은 꽃봉오리를 보면서, 괜스레 마음이 아려오던 기억. 그렇게 그 모습에서 시인 이수복은 죽은 그의 누이를 떠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동백꽃은 홑 시집간 순아 누님이 매양 보며 울던 꽃, 눈 녹은 양지쪽에 피어 집에 온 누님을 울리던 꽃, 홍치마에 지던 하늘빛의 눈물도, 가냘프고 쓸쓸하던 누님의 한 숨도, 오늘토록 나는 몰라. 울어야 하던 누님도, 누님을 울리던 동백꽃도, 나는 몰라. 오늘토록 나는 몰라. 지금은 하이얀 촌로가 된 누님이, 매양 보며 울던 꽃, 빨간 동백꽃.”
어린 이수복은 낮잠에서 깨어, 친정에 다니러 온 누이를 보고 반색을 하려다가 멈추어 서고 맙니다. 마루 끝에 앉아 있던 누님의 등은 작게 흔들리고 있었지요. 단지 동백을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누이는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어린 시절에도 시를 짓던 그 때에도, 동백을 보고 누이가 운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선명하게 붉은 동백꽃을 볼 때마다, 죽은 누이를 떠올리며 이수복은 이 시를 지었습니다. 한국적인 서정 또 한을 언어 미학으로 표출해 내면서, 제2의 김소월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2월 1일 방송>
2. “갈라디아인 들에 대한 바울의 걱정2(21-31절)”을 읽었습니다. 갈라디아인 들이란 근본적으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다보면 마치 유대인들이 다 된 듯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그들이 유대인과 조금도 다름없음을 느끼게 합니다. 바로 율법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 말입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공자의 유교정신이 강조되곤 하였습니다. 목회 초년기에 제가 구입한 <설교 사전>이란 책을 보면 대부분의 설교가 부모 공경과 형제 사랑 그리고 도덕심을 강조하는 내용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삶을 신앙의 목표로 하듯 말입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에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율법의 항목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출세와 성공의 목적이 봉사와 구제에 있는 듯 가르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해할지 몰라 미리 말씀드립니다. 율법의 큰 테두리 안에서 도덕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 전혀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만,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예수와 그의 십자가가 약화되거나 빠져버린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교회 개혁을 슬로건으로 삼고, 현존하는 국내의 대형교회들의 비리들(세습, 재정문제, 목회자의 부도덕성 등)을 고발하고 고치려는 한 단체의 과제들을 보면, 교회 안의 정관이나 재정 건전성 등을 제대로 갖추는 쪽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설교나 교육 등의 문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그런 노력이나 시도는 시류를 뒤쫓기만 하는 반쪽 개혁이 될 것 같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힘썼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절실하다는 의미입니다. 회개나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같은 근본적인 주제가 약하다는 말입니다.
기독교회에서 말하는 율법이란 세속적인 의미에서 도덕성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길을 주제로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 사람의 길 곧 도덕성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감금 며칠 만에 죽어 나온 사건이 이란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대규모의 시민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른바 대부분의 아랍문화권에서는 양성평등이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도덕의 기초가 세워질 수가 없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 기독교 선교는 선결해야 할 과제들이 너무 많고, 기존 질서와 부딪힐 난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우선 기존의 기독교 세계에서도 율법적 신앙이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데 지쳐서 아내 사라의 베개송사를 듣고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서자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반하는 인간적인 생각의 결과물입니다. 그 뒤에 사라를 통해서 적자 이삭을 낳게 됩니다. 약속의 자손입니다. 문제는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이들 사이에서 문제가 생겼는데, 나중에는 어른들 문제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내쫓겨나고 납니다(창 21:8-21). 율법의 아들 이스마엘은 약속의 아들이삭을 이기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약속의 아들의 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