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열매는 들뜬 감성만으로 기대할 수 없다. / 딤후 4:1-8.
묵상자료 7940호(2023. 2. 11. 토요일).
시편 시 119:78-80.
찬송 44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곡의 노랫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로 김소월과 노산 이은상을 꼽습니다. 노산은 생전에 2천여 수의 작품을 남겼을 만큼, 현대 시조의 대표적인 시인이지요. 양주동은 그를 두고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육당 최남선은 박달나무, 가람 이병기는 난초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출중한 이들이지만, 노산은 그 모든 장점을 갖춘 이라.”고 말이지요. 1982년 발표한 첫 시조집은 수록된 작품들의 제목만 열거하는 것으로, 얼마나 수작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가고파>, <고향생각>, <봄처녀>, <성불사의 밤>, 노산의 서정적인 시조에 곡을 분인 곡들은, 1920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요. 이들의 오늘 소개할 <옛 동산에 올라> 역시, 그의 첫 작품인 노산 시조집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은 의구련만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지팡이 도로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나.”
<옛 동산에 올라>는 홍난파의 연가곡 [나그네 마음]에 포함된 곡입니다. 비감이 느껴지면서도 낭만적인 작곡가 홍난파 특유의 음의 전개와 또 노산 이은상의 시조가 잘 어우러진 작품이지요. 이은상은 이 시조를 1928년 6월 11일 노비산에서 작사했다고 합니다. 그의 고향인 마산의 노비산에 올라서, 어린 시절 꿈결같이 흘러간 세월의 감회를 시조에 담아낸 작품이 바로 옛 동산에 올라서지요. 이은상은 노비산을 줄여서 자신의 호인 노산을 지을 정도로 노비산과 고향에 대한 애착을 내 보였습니다. 동무 생각에 등장하는 청라언덕 역시 노비산을 일컫는 시어라고 하네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2월 12일 방송>
2. “마지막 명령2(1-8절)”을 읽었습니다. 나이 탓이려니 하면서도 새벽잠이 없어진 후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하면서도 역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특히 죽음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안감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때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성경의 말씀이 너무 적은 것에 대해서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계시록의 환상적인 말씀처럼 구체적인 내용들이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절망과 아쉬움이 클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기에 꼭 필요한 만큼만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다 싶습니다. 얼마 정도는 가능성도 있어 보이고, 그리고 또 얼마 정도는 채울 희망도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진행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전제하면서 엄숙히 명령하겠다고 운을 떼십니다. 첫째는 기회가 좋든 나쁘든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종로 3-4가에서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노숙인 봇짐을 가득 실은 작은 손수레에, 기록한 지 5년도 넘어 보이는 성경구절로 가득 찬 종이들을 덕지덕지 붙인 전도자의 행색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건전한 가르침으로 설득과 감화력을 끝어내는 일입니다. 방법이야 어떻든 인격적인 방법만이 확실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칠 준비를 했다 말씀합니다. 이런 진정성이 있을 때 진리가 살아날 뿐 아니라, 다른 생명을 구원해 낼 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서구권에서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조금 더 두고 볼 일입니다. 아프리카 흑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오순절 운동은 미국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감성에 호소하는 복음가를 앞세운 이런 운동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약점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깊이가 없는 것도 약점입니다. 신앙에는 감성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의지 역시 중요한 결단의 요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이나 삼위일체 신앙 등, 교리를 무시하는 경향은 타종교와의 경쟁력에서 맥없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와 같이 이단이 창궐하는 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트레이드마크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도록 일깨우며 결단하게 하는 전도야말로 더딘 것 같지만, 가장 든든한 반석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방식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이 가르치는 온전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오직 하나님이 주실 의의 월계관만을 바라보며 달음질 하고 있다고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