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1. 토요일] 형제들 역시 평범한 인간들. / 요 7:1-9.
묵상자료 7968호.
시편 시 119:153-155.
찬송 47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고파>의 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이 타계한지 25주기가 됐습니다. 노산의 시가 없는 한국 가곡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시는 한국 가곡사를 풍성하게 만들어 왔지요. 혹자는 노산의 시나 시조가 지닌 정형성 덕분에 작곡가들이 음악으로 만들기에 용이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작곡가들이 그의 시를 가곡으로 완성한 것은, 노산의 시안에 담긴 뛰어난 서정성 그 표현력 때문이었을 거라 짐작해 봅니다. <사랑>, <그리움>, <그리워> 같은 작품들이 창작된 지 반 세기가 넘은 지금에도, 여전히 깊은 공감을 얻으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걸 보면 말이지요.
“뉘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시는 고, 백천(百千) 길 바다라도 닿는 곳 있으리만, 임 그린 이 마음이야 그릴사록 깊으이다. 하늘이 땅에 이었다 끝잇는 냥 말지 마소. 가보면 멀고멀고 어디 끝이 있으리오. 님 그린 저 하늘 해, 그릴 사록 머오이다. 깊고 먼 그리움을 노래 우에 앉노라니, 정회(情懷)는 끝이 없고 곡조는 짜르이다. 곡조는 짜를 지도, 남아 울림 들으소서.”
그리움을 주제로 하는 많은 가곡 가운데 노산의 시에 채동선이 작곡을 한 <그리워>와 함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지요. 노산 이은상과 홍난파의 감수성은 서로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산 이은상은 춘원 이광수, 무애 양주동과 함께 당대 최고의 천재로 꼽혔던 인물이었지요. 시대를 앞서갔던 천재로써 외로웠던 삶, 그의 그늘진 마음은 그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홍난파는 노산 이은상의 글이 지닌 감수성을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작품을 통해서 음악으로 가장 잘 표현해 냈지요. 노산 이은상의 시가 담아낸 그리움과 쓸쓸함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그런 곡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3월 10일 방송>
2. “믿지 않는 예수의 형제들(1-9절)”을 읽었습니다. 일반인의 말이든 정치가의 말이든, 심지어 성경의 말씀까지도 어느 한 구절만 쏙 빼내어 공격이나 칭찬을 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에는 맥락이 있게 마련인 때문입니다. 말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침을 다 들어봐야 맥이 통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말의 배경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나 곡해를 하지 않도록 성경 기자들은 상당히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읽었던 5장에서 6장을 건너 뛰어버려서 부득불 배경 설명을 6장에서 가져와야 하겠습니다. 6장 60-65에서는 “믿지 않는 제자들”이란 표제어가 있고, 6:66-71에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는 표제어가 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 많던 군중들이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하더니 제자들도 불평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가겠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공관복음서(막 8:22-9:1, 마 16:13-28, 눅 9:18-27)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군중을 몰고 다닌다는 예수님께서도 적어도 두 가지 이유, 십자가 예고와 세상의 악행을 고발하시자 배척을 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또 다른 배경 하나는 우리 주님의 일행이 유다 지방에 있을 때,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가 있는 것을 아시고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서 갈릴리 지방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던 예수님의 형제들이 갈릴리 보다는 유다로 가서 훌륭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입니다. 훌륭한 일들이란 남들 모르게 하기 보다는 널리 알리는 것이 좋겠다는 설명까지 곁들이면서 말입니다. 이 말을 두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의 형제들조차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제안은 진심에서 하는 부탁이 아니라 빈정거리는 말투였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엉뚱하게 들리기까지 합니다. “너희에게는 아무 때나 상관없지만,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중략>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매우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시기와 질투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정치권에서 흔하게 인용하는 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문제를 적용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의 인성(人性)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드님이 가지신 신성(神性)도 가지신 분임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형제들 역시 우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필부필부(匹夫匹婦)였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