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등불을 켜 주실 우리 주님께. / 요 8:12-20.
묵상자료 7972호(2023. 3. 15. 수요일).
시편 시 119:164-166.
찬송 6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곡가 김연준은 음악가 이전에, 교육 사업가로써의 명성 또한 컸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한양대학교를 향하는 길에, 늘 왕십리를 지나면서 왕십리가 변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봤지요. 세월의 흐름과 상관없이 소박하고 꾸밈없이 부지런히 사람들의 모습은 김연준이 환우 중에도 작곡을 놓지 않을 만큼 사력을 다해 살아가는 데 큰 가르침이 됐습니다. 그가 소월의 시 <왕십리>를 가곡으로 완성한 때가 고희를 바라보던 때였지요. 자신의 음악세계 안에서 서정적이고 한국적인 선율을 담은 곡을 다시 한 번 쓰고 싶었다는 그의 바람처럼,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김연준의 가곡 <왕십리>는 그렇게 완성 됐습니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은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삼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오. 비마저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비가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서울 하늘 아래서 김연준은 학교로 향하고 있습니다. 비에 젖어가는 왕십리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평소 즐겨 애송하던 소월의 시집에서 <왕십리>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김소월은 이 시 <왕십리>를 1923년 여름 [신천지]라는 잡지에 처음 발표를 하지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나, <가는 길>처럼 소박하고 꾸밈없이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비오는 날의 고독과 서정을 잘 담아 낸 곡이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3월 13일 방송>
2. “나는 세상의 빛이다(12-20절)”을 읽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특징 중 하나는 “계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 중에 “나는 --이다.”라는 말씀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말은 감추어져 있던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인데, 그동안 주님이 누구신지가 베일에 감추어 있었는데, 주님께서 친히 베일을 벗기시고 당신 자신을 밝히 드러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해설을 붙이셨습니다. 그러자 첫 반응은 바리새파 사람들로부터 왔는데, 자기 자신을 증언하는 것을 참되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에, 자신이 하는 증언은 참되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래된 인간의 질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데(15-20절), 이는 이른바 예수님의 어록집으로 가정하는 Q자료(마 7:1-6, 눅 6:37-42)와 많이 닮은 말씀입니다. 판단에 관한 말씀인데, 사람들은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두 세 사람이 증언할 때나 참되다 하지만, 주님의 판단 역시 당신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신다고, 그래서 공정한 판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말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요한복음서가 역사적 사실들을 순서대로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편집한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 짐작됩니다.
오늘 묵상의 주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는 말씀은 대표적인 예수님의 계시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을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의미에서는 해가 비추는 낮 동안에는 많은 위험 지대를 피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햇빛이 환히 비추는 대낮에도 정신적인 의미에서는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라서 헤맬 때가 많습니다. 그 역시 마음 안을 비추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연과 만물을 비추는 태양 빛처럼, 우리들 마음을 깨우쳐 주는 마음의 등불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시골로 와서 맨 처음 해 보고 싶었던 것은 이곳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마음의 등불을 하나씩 켜두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가정에서건 학교에서건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고, 그래서 지능에 따라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뭔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가르치고 싶다.”고 소개하였지만, 부모들은 선행학습을 기대하고 있었고, 또 다시 실패감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태양 빛은 허락되었지만, 마음의 등불은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하는 멜랑꼴리(우울증)이란 처방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