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 / 요 12:9-19.

박성완 2023. 4. 3. 00:00

묵상자료 7991(2023. 4. 3. 성주간 월요일).

시편 시 126:1-3.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길 걷기가 참 어렵다. 지난 2014년 동계 올림픽 기간 내내 예기치 않게 발목을 잡아채는 돌발변수에 대한 생각이 참 많았다. 잘 달리던 선수가 다른 선수의 스케이트 날에 채어 함께 넘어지는가 하면, 멋지게 잘 하고도 석연찮은 판정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슬쩍 속임수로 승리를 따내기도 하고, 은 좋은 어부리리의 금메달도 있었다. 불운은 우리에게만 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한순간을 위해 몇 년간 흘린 피땀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물거품이 되었을 때, 원망과 한숨이 어찌 없겠는가? 또다시 그 긴 고통의 시간 앞에 설 생각에 그때 가서 다시 이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쩌나 하는 마음까지 더해지면 원망은 공포를 수반한다. 판정을 번복할 수 없다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마음공부의 문제다.

    예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펴낸 안정복(1712-1791) 수택본 해제집을 살펴보니, <과위교/過危橋>란 제목의 책이 있다. 송대 철학자 장재와 주돈이 등의 저술을 초록한 내용으로, 표제가 흥미를 끈다. 위태로운 다리를 지난다니, 무슨 뜻으로 책에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실은 글의 취지로 보아 마음 다스리기의 어려움이 출렁대는 아슬아슬한 다리를 건너는 것보다 더 위태롭다는 뜻으로 보인다. 윤현(1514-1578)의 시에 <위태로운 다리를 걸어서 지나다>란 작품이 있다. ‘백 보 길이 위태론 다리 높이가 백 척인데, 기운 판이 흔들흔들 굽어보니 아찔하다. 말을 타고 건너려도 어찌해볼 길 없어, 부축하게 하려하나 오히려 할 수 없네. 어지런 눈 어질타가 눈앞이 캄캄하고, 온몸이 덜덜 떨려 후회가 밀려온다. 지나고야 비로소 살아 있음 깨달으니, 출렁대는 인간 세상 이것과 다름없네.’

    느닷없는 위기 앞에 오금이 떨리고 공포가 밀려온다. 나아갈 수도 돌아가지도 못한다. 그래도 결국은 그 다리를 건너야 다음 목표를 향해 갈 수가 있다. 다친 마음들 보듬어 굳은 땅을 딛고, 용기백배 일어서서 가야겠다.”

정민 편, <옛 사람이 건넨 네 글자>, pp.15-17.

 

2. “나사로를 죽일 음모(9-11)”예루살렘 입성(12-19)”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153 세차장>, <호산나 미용실>, <나사로 요양원>, <실로암 안과>, <에바다 기도원> 등은 길을 가다 만난 간판 이름들입니다. 모두 성경에 나오는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아마도 이런 성경에서 가져온 이름들은 수백 개가 넘을 것입니다. <나사로 요양원>이나 <에바다 기도원>그리고 <실로암 안과>는 어울리는 것이지만, <153 세차장><호산나 미용실>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습니다. <배하람>은 제가 주례한 분이 자식을 낳아 지어준 이름인데, 성은 배씨요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의 약자라 했습니다. <김예랑>은 김 씨 성을 가진 예수님의 사랑을 줄인 말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름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의미와 가치를 전해주려는 부모님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데, 문제는 모세 이 새끼야, 너 이럴 수 있어?”하고 다투는 장면을 보았을 때는 그 좋은 이름도 여지없이 훼손되어 버리니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소문이 널리 퍼지자 그를 보려는 사람들로 베다니가 시끌벅적하게 되었고, 이에 질투를 느낀 대제사장등이 나사로를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는 내용입니다.

    나사로는 성경에 두 번 등장하는데, 한번은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로 죽은 지 나흘 후에 다시 살게 된 오늘의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후에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으로, 세상에서 그를 무시하고 홀대하던 부자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자신의 타는 입술에 적셔달라고 간청하는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16:19-31) 나사로입니다. 두 곳에서 비춰진 나사로의 이미지는 매우 평범하고 무골호인 형의 범인(凡人) 상을 풍기고 있습니다. 결코 사람들 앞에 나서서 구호를 외치는 선동 형은 꿈도 꿀 수 없는 나약한 이미지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대 베들레헴 주변의 영아들이 햇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해당한 슬픈 이야기가(2:16-18) 뜬금없이 떠오르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그 영아들이 영원히 죽은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는 어제 농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한 농인이 소리를 내어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다른 찬양하는 농인들은 수어(手語)를 하고 있는 그 틈에서 어눌하게 소리를 내어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찬양이었다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거나, 가난과 차별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훨씬 가깝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섬광처럼 지나갔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제 것이 아닌 양 그것조차 거부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