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찰나의 고통과 영겁의 기쁨. / 요 16:16-33.

박성완 2023. 4. 15. 00:00

묵상자료 8003(2023. 4. 15. 토요일).

시편 시 132:1-5.

찬송 41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뉴턴은 프리즘 실험을 통해 빛이 무색이 아니라 여러 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빛이 지닌 파장의 크기에 따라 색이 달라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는 색은 물체 고유의 색이 아니라 고정관념의 색이며, 이 고정관념은 간단하게 깨뜨릴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빨간 사과에 초록색이나 파란색을 비추면 검정 사과로 보이니까요. 이래도 사과는 빨간 색일까요? <중략>. 인간의 눈(원추세포)은 이중 가장 긴 파장, 중간 파장, 짧은 파장 세 가지만 인지할 수 있고, 그 결과가 빛의 3원색인 빨강(570-590nm), 초록(535-550nm), 파랑(440-450nm)으로 나타납니다. 그 밖에 보이는 수많은 색은 우리의 뇌가 원추세포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바탕으로 빛의 3원색을 혼합해서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아예 볼 수 없는 빛이 있습니다. 빨간색 너머에 존재하는 빛(적외선)은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짧아서, 보라색 너머에 존재하는 빛(자외선)은 길어서 볼 수 없고, 이를 비가시광선(非可視光線)이라고 합니다. 햇빛에서 가시광선이 차지하는 비율은 단지 33%, 나머지는 비가시광선인 적외선 60%와 자외선 7%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우리는 빛의 일부인 33%가 전달하는 색감만 볼 수 있으며, 나머지 63%의 빛이 전달하는 색감은 미지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꿀벌을 비롯한 곤충, , 파충류, 양서류는 자외선을 볼 수 있어서 인간이 보는 색과 완전히 다른 색을 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눈에는 똑같이 하얗게 보이는 배추흰나비 암수지만, 그들이 서로를 볼 때, 암컷은 희게, 수컷은 검게 보인다고 합니다. , 한 가지 색으로 보이는 꽃 한 송이에 달린 꽃잎조차 테두리 쪽과 수술이 달린 중앙의 색이 다르게 보인다고 하지요. 우리가 보는 색이 사실은 빛의 파장으로 생겨나는 것이며, 그조차 33%만 인지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철학적으로 와닿습니다. 네가 보는 세상은 단지 일부일 뿐이며 아마도 평생 그리하리라. 그러니 전부를 본 것처럼 착각하면서 세상일이란, 인생이란, 인간이란, 운운하면서 함부로 단언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유선경, <문득 묻다 : 세 번째 이야기>, pp.18-20.

 

2. “너희의 슬픔이 기쁨으로(16-24)”내가 세상을 이겼다(25-3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슬픔이란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감정중 하나로, 자신 또는 남의 불행이나 실패의 경험 등을 통해서, 혈액 순환이 약해지고 호흡이 느려지며 안색이 창백해지고, 흔히 눈물을 흘리는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기도 하다고 사전은 설명합니다. 이렇듯 슬픔이란 감정은 하루에도 자주 경험할 수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지만, 이 감정을 오래 품고 있으면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에서 주님은 매우 반가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을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실 것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감당할 헤어짐의 슬픔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 속에는 희망의 말씀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얼마 안 가서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용한 단어는 잠시 잠간을 의미하는 미크론(μικρον)이란 단어입니다. 가끔 받게 되는 질문 중에는, 인류의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될 것이냐란 물음이 있는데, ‘잠시 잠간곧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신이 숨을 거두자마자 하나님의 심판 자리로 옮겨간다는 말입니다. 영원 혹은 영겁인 하나님의 시간에 견줄 때, 인간의 시간은 찰나인 것이지요. 제자들이 이 짧은 시간에 대해서 알아듣지 못하자, 주님은 설명을 붙이셨습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과 새 생명의 탄생이 주는 기쁨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은 긴 고통과 짧은 기쁨이 상식이지만, 천국에서는 정반대라고 말입니다.

   긴 고통과 짧은 기쁨은 속임수 같다고 생각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짧은 고통과 긴 기쁨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삶의 내용을 고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불교가 주장하는 중심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인생사를 찰나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 만 번의 윤회환생을 거쳐 해탈하기까지는 고통을 반복한다는 가르침이 사람들을 절망하게 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 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은 잊어버리게 된다.”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늘 아버지께서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지 모릅니다. 그 찰나의 고통 중에 작은 위로와 힘이 되리라 생각하시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