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보여준 신앙자세. / 단 3:19-30.
묵상자료 8010호(2023. 4. 22. 토요일).
시편 시 134:1-3.
찬송 38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TV를 통해서 가곡의 밤과 같은 가곡 연주회를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주 드문 일이 돼 버렸지요. 가곡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가곡이라는 장르는 성악을 전공한 이들의 음악, 혹은 음악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음악으로 밀려난 것이, 가곡의 팬으로써 안타갑기만 합니다. 다른 음악 장르에 비해서 유독 우리 가곡만 점점 설 곳을 잃어가는 것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조금은 현대적이지 못한 음악적 성향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하더군요. 뜻 있는 작곡가들은 젊은 세대들도 편히 듣고 즐길 수 있도록, 기존의 가곡을 편곡하거나 현대적인 음악 기법으로 새로운 가곡을 만드는 시도들을 해 왔습니다. 작곡가 이한철이 그랬습니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이 봄도 산허리엔 초록 빛 물들었네. 세상 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 살으리라. 길고 긴 세월 동안 온갖 세상 변하여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청산에 살리라>는 지난 1월 타계한 김연준의 대표곡입니다.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유복한 삶을 지내온 김연준에게 가장 혹독한 시기였던 1993년 완성된 곡이지요.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돼 잠시 자유롭지 못했던 때에도, 그는 음악에서 탈출구를 찾았고 위안을 얻었습니다. 우리 가곡을 대표하는 곡들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작곡가 이현철은 우리 가곡의 대표곡을 새롭게 편곡하는 작업으로 이름을 알려왔습니다. 작곡가 김연준의 노랫말에 새롭게 작곡을 하고, 기존의 <청산에 살리라>를 곡 중간에 마치 돌림 노래처럼 삽입해, 또 하나의 색다른 가곡을 만들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4월 23일 방송>
2. “유다인 세 청년이 불가마에서 살아나오다2(19-30절)”을 읽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요술 방망이 정도로 이해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종교라고 한다면 신앙의 길은 요술 방망이를 찾아가는 노정(路程)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힘든 고행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불교는 사랑하는 가족 친지를 떠나서 가장 흉해 보이는 가사장삼을 누덕누덕 기워 입은 몰골로 동냥 비슷한 시주를 구걸하며 살아야 하고, 힌두교는 윤회를 믿는데 더 나은 인생과 천한 미물로도 환생하기에 선한 업을 쌓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고 하며, 이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6신 5행이라는 규율을 지키는데 그 중의 하나는 성지를 순례하는 엄청난 시련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 역시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니 이 또한 엄청난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왕의 권위를 무시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의 특명으로 화덕의 온도를 일곱 배나 더 높인 불구덩이에 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왕은 이 세 젊은이를 밧줄로 묶어 활활 타오르는 화덕에 던져진 것입니다. 그런데 형을 집행하는 집행관들이 화덕의 불길에 타죽고 만 것입니다.
화덕을 주시하던 느부갓네살 왕은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화덕에 던져진 사람이 세 사람이 아니더냐? 그런데 화덕에서 아무 탈 없이 거닐고 있는 네 사람은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말입니다. 왕은 그 네 번째 사람이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왕은 외쳤습니다.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아 어서 나오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를 체험한 왕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화덕에서 나온 세 젊은이를 살펴본 관리들은 그들의 몸이 불에 데기는커녕 머리카락 하나 거슬리지 않았고 도포도 눋지 않았으며, 불길이 닿은 냄새조차 않았다 보고합니다. 마침내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다고 외칠 뿐 아니라, 더 이상 그들의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며 욕하는 자는 토막 내어 죽이겠다고 명하며,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에게 더 높은 벼슬을 주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이 일화는 마치 최후의 심판을 앞당겨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 가운데는 다니엘서를 구약의 계시록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한다는 것은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이라 말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