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 렘 31:1-14.
묵상자료 8022호(2023. 5. 4. 목요일).
시편 시 136:13-15.
찬송 41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막을 건널 때에는 지도를 보지 말고, 나침반을 봐야 한다고 하지요. 비람에 모래가 이리저리 쓸려서 길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길을 표시하는 지도보다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훨씬 더 믿을 만 하다는 얘기입니다. 흔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사막 건너기에 비유합니다만,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지도 속의 길처럼 그렇게 분명한 길들이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이 있거든요. 그런 사막을 건널 때, 우리가 지켜야 할 요령가운데, 실천하기 제일 쉬운 게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이게 아닌가 싶어요.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어가라.” 사막에서는 언제 또 오아시스를 만날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잠시라도 멈췄다 가는 것이 더 오래 더 멀리 잘 갈 수 있는 요령이라는 얘기지요. 우리에게 주말은 그런 오아시스 같은 날인 것 같습니다. 가던 길 멈추고 충분히 쉬면서 마음의 여유와 활력을 찾는 시간. “오아시스에는 반드시 쉬어가라.”는 그 말 잊지 마시고, 편안한 주말 설계해 보시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년 5월 3일 방송>
2. “이스라엘과 유다는 회복되리라 4(1-14절)”을 읽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읽는데 불현 듯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의 “히브리인들의 합창”이 생각났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날아라. 상념이여 빛나는 날개를 타고/ 내 조국 산비탈과 언덕에 내려앉아라/ 부드럽고 따뜻한 산들바람/ 코에 맴도는 감미로운 흙냄새/ 그리워라. 요르단 강둑/ 시온의 무너진 탑들 반갑네/ 아, 잃어버린 아름다운 내 조국!/ 아,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 현명한 예언자의 황금 하프여/ 어찌 버드나무에 달린 채 잠잠한가?/ 우리들 가슴 속 추억을 되살려/ 지난날이 어땠는지 말해주렴!/ 아니면 솔로몬의 운명처럼/ 구슬픈 비탄의 가락이라도/ 아니면 주님께 용서와 자비를 간구하라/ 고난을 견디도록 힘을 주소서!/ 고난을 견디도록 힘을 주소서!/ 고난을 견디도록 힘을 주소서!/ 고난을 견디도록!” 저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들 이스라엘과 유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을,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렸다는 것을,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율법을 더욱 더 철저히 지키려고 힘쓰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잘못 깨달았다고 말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은총의 복음에 눈을 떠야했다고 말입니다.
예나 제나 우리는 율법의 노예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십계명을 외우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에서 반드시 모든 교우들이 소리를 맞춰 합독(合讀)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도 율법을 다 지킬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어느 한 조항도 지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되는 때문이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누구에게도 음욕을 품어서는 안 되는 때문입니다. 그들과 우리들이 깨우쳐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리석고 연약한 우리를 덮어주시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 인간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을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포도를 심고, 심은 사람이 그 포도를 따 먹게 되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소경, 절름발이, 아기 가진 여자, 아기 업은 여자도 섞여 큰 무리를 이루어 돌아오리라. 그들은 울면서 떠나 간 길을, 위로받으며 돌아오리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새 역사를 동트게 하실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아멘! 아멘! 아멘! 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