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제 빛을 발할 때. / 렘 32:16-25.
묵상자료 8027호(2023. 5. 9. 화요일).
시편 시 137:4-6.
찬송 26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상의 날은 특별한 의지나 의도가 없어도 그럭저럭 그냥저냥 굴러간다. 어제의 관성慣性이 오늘을 밀고 간다. 그게 지겹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면 타성惰性이 된다. 오늘이라고 어제와 크게 다를 건 없다. <중략>. 삶이란 게 그렇다. 나이 한 살 먹는 것도 정월 초하루만 처연하고 비장하지 금세 작년의 나와 비슷하게 살아간다. <중략>. 매일이 설렌다는 건 여간한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누리는 사람이 있다 해도 별로 부럽지 않다. 그건 이미 진정한 설렘의 맛을 상실한 설탕 버무림 정도일 뿐이다. 억지로 당의糖衣를 입혀놓고 좋아라 하는 건 낯간지러운 일이다. 어제 먹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먹는 것으로도 매일의 설렘을 채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저 잠깐 혀를 위안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내가 식도락의 즐거움을 제대로 모르는 위인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설렘은 누가 주는 게 아니다. 한 주의 하루나 이틀쯤은 그런 사치를 누려도 된다. 누가 시비할 것도 아니다. 봄날의 아침 출근길 바쁜 발걸음에 얼핏 보았던, 봉오리가 막 터지고 있던 녀석이 한낮의 햇살을 받고 얼마만큼 꽃눈을 열었을까 궁금하면 되근길 짧은 설렘이 안주머니에서 빙그레 웃는다. 그런 설렘쯤은 누려야 산다. 벤츠니 벤틀리니 하는 고급차 따위 없어도 하루 일과 마친 무거운 발거음이 설렘의 길을 누리며 걷는 게 축복이다.
그 여리디 여린 꽃눈의 개화 하나가 오늘을 어제가 되풀이되는 하루가 되지 못하게 만든다. 어제와 같은 하루를 사는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오늘을 잠깐이라도 맛보는 나는 어제의 나와 같지 않다. 신앙을 가진 이들이 흔히 말하는 부활이 뭐 별 거랴. ‘어제의 내가 아닌 것(I am not what I was)’ 그게 바로 부활이지. 그러므로 설렘은 부활의 씨앗이다. 산지기가 삼 씨앗 여기저기 뿌리며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언젠가 누군가가 그 잎과 뿌리를 만났을 때, 짜릿함과 행운을 혹은 건강을 누리는 것처럼, 가끔은 그 전날 그 설렘의 씨앗을 뿌리고 틔워볼 일이다.”
김경집, <생각을 걷다>, pp. 28-30.
2. “예레미야가 밭을 사다 2(16-25절)”을 읽었습니다. 가끔 받는 질문 중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섭리하시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겠는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하시고 상과 벌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피곤하게 일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집집마다 골라 주시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고, 어린 나이에 또는 쓸데없이 늙도록 살게 하시다 부르시는 것도, 참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다가 깨우쳤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습을 요약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은 수천 대까지, 조상의 죄는 삼사 대까지 후손들에게 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대로 섭리하시는 분이신대, 사람들의 생활태도와 행실을 낱낱이 지켜보시다가, 그에 따라서 갚아주신다고 말입니다. 마침내 이집트 종살이에서 당신 백성들을 불러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다 주셨지만, 이 좋은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주의 법을 따라 살지도 않고, 분부하신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갖 재앙을 당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기근과 염병으로 그리고 바벨론의 원수들 손에 떨어지게 한 것입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시절에 하나님은 증인을 세우고 돈을 주고 밭을 사라하시니, 이 어찌된 일이냐고 예언자는 묻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초점은 이 마지막 한 마디 질문입니다. 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많고 많은데 어찌하여 밭을 사라하십니까? 우리들 역시 급히 몰아치는 숨을 멈추고 조용히 질문을 해야 하겠습니다. 전국 복음화 운동을 통해 마을 마다 1교회 짓기 과제를 완수했는데, 농어촌엔 문을 닫은 교회가 속출하고, 중소도시엔 통폐합하는 교회들이 생겨나는 판인데, 어찌하여 젊은 목사들을 양성하고, 새로운 교회당을 지으라고 하십니까? 가나안 성도들이 확산되고 있는데, 하나도 바뀌지 않은 구식 전도방식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말입니다. 어제의 내가 아니듯, 어제의 교회가 아니어야 하겠습니다. 그게 우리들이 깨우쳐야 할 부활이니까 말입니다. 냉장고 경품을 거는 전도대회은 어제의 모습이었습니다.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찬송가 263/511장). 일찍부터 인격전도를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복음의 내면화, 복음의 인격화만이 참다운 전도라고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드레는 그의 형제 시몬을(요 1:40-42), 빌립은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요 1:45-46) 전도했던 것입니다. 내면화 혹은 인격화된 신앙이 아니고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