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약속을 지키지 못한 변명(?) / 고후 1:12-22.

박성완 2023. 6. 13. 00:00

묵상자료 8062(2023. 6. 13. 화요일).

시편 시 145:8-10.

찬송 48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 현대 문학에 있어서 여류 시인의 존재는 귀했습니다. 1920년 대 김일엽, 나혜석 등이 시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문학적인 활동을 했습니다만, 본격적인 여류시인이 등단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지요. 우리에게 친숙한 두 시인이지요. 노천명과 모윤숙이 등단한 시점이 바로 그 즈음입니다. 이후 1950년 대 홍윤숙과 김남조 등이 등단하면서 이들의 문학은 보다 본격적으로 하나의 시류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김지향이 있었지요. 먼지와 소음에 부대끼는 현대인의 고독한 생에 있어서, 기다림만이 의미 있는 것이라 항변했던 그 시인 말입니다.

    “기약하고 떠난 뒤, 아니 올 동안. 꽃밭엔 잡초만이 우거져 있네. 그 후론 날마다 아니 피는 꽃이여, 행여나 오늘은 맺어지려나. 보내고 한 세월을 방황할 동안, 창문에 달빛조차 오지를 않네. 그 후론 밤마다 아니 오는 창을, 행여나 오늘은 열려지려나.”

    낭만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대 도시의 문명은 참 비정하기만 합니다. 차가운 빌딩숲에 기하학적 조회는 생명 있는 불빛이 사그라진 밤이 되어서야 조금은 견딜 만 하게 느껴지고 말입니다. 시인 김지향은 자신의 감성을 두 시인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쏟아냈습니다. 생명이 거세된 회색 공간 속에서도, 사람이 지니고 있는 에너지가 가장 큰 힘이 될 거라고 말이지요. 김지향의 시는 기다림의 시라 불리기도 합니다. 그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으로 우리 생의 의미가 더욱 더 뚜렷해진다고 말이지요. 반드시 그가 오지는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김지향시 김규환 곡 <기다림>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613일 방송>

 

2. “바울의 계획 변경의 설명(12-22)”을 읽었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약속을 지키는 일입니다. 택배 기사가 물건을 전해주겠다는 날짜와 시간을 지키는 일, 정수기 기사가 방문을 알린 일, 그리고 시골생활을 보고 싶다며 찾아오려는 친구와의 약속 등 등. 그런데 대부분 약속한 날짜와 시간을 잘 지키는 편입니다만, 어떤 경우는 낭패다 싶을 정도로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전화 한 통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아산으로 내려와 거실 청소도 하고, 잔디밭 풀도 깎아두고, 채전의 잡초도 뽑는 등 한 이틀은 요란법석을 떨었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약속 당일 아침에 그런 전화를 받을 때는 참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납니다. 정수기 기사와 가진 약속이 있었는데, 약속 당일 아침에 그런 전화를 한 것입니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오기 전에 알려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까운 것은 기금 값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선약(先約)이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런 일이 있게 되면 신뢰감이 떨어지고, 두 번 다시 약속하는 것이 망설여집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비슷한 상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전말(顚末)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추측만 할 뿐입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알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틀어지게 되어 이를 알렸는데 고린도교회에서는 사도에 대해서 도에 넘치는 험담이 분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성까지 의심받게 된 셈입니다. 편리할 대로 이랬다 저랬다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의 말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민주 사회에서의 사회생활이란 쌍방이 대등한 입장에서 한 약속은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 만약 사정이 생겨서 지킬 수 없는 경우도 생길 터인데, 그럴 때는 정중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 어려운 처지를 상대에게 미리 알리고 양해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차를 따르지 않게 된다면, 둘 사이에는 신뢰가 상처를 받게 되고, 마음은 멀어져갈 것입니다. 사도와 고린도교회 사이에 이런 간격이 생긴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정리해 보면, 사도는 유럽의 관문이었던 마케도니아 지방을 순회한 후, 고린도 교회에 들려서 도움을 받아서 유다로 갈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고린도 교회에서 받으려 했던 도움이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였던 것입니다(고전 16:1-9).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던 사도로써는 자신을 위한 모금이 아니라, 연약한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것이었으니 당당할 수도 있으련만, 그마저 차마 입을 떼기가 어려웠을 텐데, 오해까지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해명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도는 행여라도 교우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봐를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