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바울의 어리석은 자기 자랑이 한없는 감사와 위로가 되는 까닭은. / 고후 11:16-33.

박성완 2023. 6. 28. 00:00

묵상자료 8077(2023. 6. 28. 수요일).

시편 시 148:4-6.

찬송 4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마다 유월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겠지요. 오래전 어느 유월에는 이산가족 찾기를 보다가 TV를 보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유월에는 월드컵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마다 붉은 물결을 이루었던 때도 있었지요. 이 이제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올해 유월을 추억한다면 작은 촛불이 모여서 큰 불 빛을 이루었던 그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우연하게도 우리의 유월은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기회가 많았지요? 이번 유월이 우리에게 준 많은 의미,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시간이 빠르다는 말은 게으른 자의 변명일 뿐이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만, 이맘 때 참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1년의 절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오히려 되묻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늘 그래왔듯이 이제 남은 절반은 더 빨리 지나가겠지요. 그 반환점을 돌고나면 지금껏 뛰어온 것보다도 결승점에 이르는 거리가 더 짧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또 12월이 되면 다시 또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물을 테고 말이지요. 후회 없이 늘 계획한 대로 사는 사람은 위인전에만 나오는 그러한 분이 아닐까? 그런 변명을 하면서 말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630일 방송>

 

2. “사도 바울의 수고(16-33)”을 읽었습니다. 1970년대 어느 민중 신학자는 바울에게서 예수에게로!”라는 주장을 해서 많은 눈길을 받았습니다. 주장의 골자는 귀족 신학자인 바울에 가려서 천민과 자신을 동일시한 예수를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신학의 강한 영향력이 예수의 정신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빠진 신약성경을 상상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세우고 가르친 예수 공동체가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기독교회는 제대로 허리를 펴고 서 있을 수나 있었겠느냐고 말입니다. 차제에 바울 서신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 히브리서나 복음서가 씌여졌음을 생각한다면, 기독교회는 바울에게 진 빚이 엄청나다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 기독교 역사에 바울이 없었다고 한다면, 과연 예수의 말씀이나 구원행적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까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부모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닿을 수 있듯,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바울의 위인 됨에는 반대급부도 따르게 마련이었습니다. 우리처럼 갑남을녀에게는 생길 수 없는 주도면밀한 비난이 빗발치듯했다고 말입니다. 바울을 연구한 학자들은 이런 비난에 대해서 자신을 변증하고 있는 것이 고린도 후서라고 합니다. 이런 비난에 대해서 적어도 네 가지 자기 변증이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외모에 대한 비난의 변증과(고후 10:7, 고후 5:12, 고후 11:4), 둘째는 말이 어눌하다는 비난에 대한 변증(고후 10:10, 고후 11:6), 셋째는 권위에 대한 공격을 변증(고후 1:11, 고전 15:8, 9), 넷째는 교훈에 대한 비난을 변증(고후 4:2-5)하는데, 바울 당시에도 그가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전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심각한 곡해와 오해 한 복판에서 드디어 바울은 소위 정공법을 택합니다. 곧 어리석은 자에게는 어리석은 방법으로 응대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밝힌 것 말입니다. 흔히 어리석은 자들이 꺼내는 자기 자랑입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인 것을 내세우면 자신도 히브리 사람이고,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자신도 그렇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자신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면 자신도 그렇다고 말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리석은 자랑을 풀어놓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역과 감옥에 갇힌 일들, 수도 없이 맞은 매질과 죽음 문턱에 이른 일들, 39대의 매질을 다섯 번이나 받고, 몽둥이로 맞기도 하고 돌로 맞기도 했던 일들, 파선을 당한 일들도 세 번이나 되며, 셀 수 없이 많은 위험들, 강도들과 민족과 이방인 그리고 거짓 형제의 위험이 뒤따랐다고 말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고통은 물론 여러 날을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어리석다고 전제한 바울의 자기변명은 오늘 우리들에게는 한없는 감사와 위로가 되고 있으니 결코 어리석은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시련은 오직 예수와 그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던 것입니다(고전 2:2). 바울의 삶의 모든 순간들은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