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교회가 힘쓸 최우선적인 문제 : 양질의 신학교육. / 눅 20:41-21:4.

박성완 2023. 7. 6. 00:00

묵상자료 8085(2023. 7. 6. 목요일).

시편 시 150:4-6.

찬송 37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이나 작곡가의 작품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사랑, 이별, 그리고 그리움이겠지요. 그 가운데서 그리움은 특히 모든 대상을 포괄하는 넓고 애틋한 정서입니다. 이성뿐 아니라, 친구,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말이지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은 늘 가장 행복했던 때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결국은 현재 위에 그리움이라는 감정으로 힘없이 귀결되어지고 마니까 말입니다. 우리 가곡 가운데 그리움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그렇게도 많은 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늘 그 그리움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달빛이 흐르는 밤 적막한 어두움 속에, 뒷동산 어디선가 소쩍새 구슬프다. 그대가 왔노라고 일러주는 노래일까? 등잔불 심지 돋아 써 보낸 긴긴 편지, 이제사 받아들고 찾아와 주실 건가. 달빛이 흐르는 밤, 그림자로 가시더니. 그날 밤 오늘인가 소쩍새 구슬프다. 그녀가 떠났노라 일러준 노래일까? 뒤뜰로나 창문을 활짝 열어 모이던 날, 이제야 알고 나서 찾아와 주실 건가.”

    그리움이라는 제목의 가곡은 다양한 시인과 작곡가의 작품으로 일흔 곡이 넘게 존재합니다. 그러다 보니 시인 유치환처럼 한 작가가 그리움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편의 시를 쓰기도 했고요. 작곡가 역시도 그리움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여러 개의 작품이 존재하지요. 작곡가 김동환 역시도 <그리움>이라는 제목의 곡이 두 곡입니다. 방금 들으신 송문헌 시에 곡을 붙인 그리움은, 그런 이유에서 편의상 <그리움 1>이라 부르고요. 또 박경규의 시에 곡을 붙인 다른 그리움은 <그리움 2>라 부릅니다. 작곡가 홍난파 이수인 조두남의 그리움과 마찬가지로, 어느 곡을 택한다고 해도 그리움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특유의 애틋함은 모두 고스란히 지니고 있지요. 송문헌 시 김동환 곡 <그리움>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77일 방송>

 

2.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41-44)”,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45-47)” 그리고 과부의 헌금(21: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들은 짧습니다만, 그 주제들은 판이하게 다름으로 한 편의 묵상을 하기에는 산만해지기 때문에 한 단락만 묵상하는 것이 옳겠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주일을 맞을 때는 주로 TV로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알게 됐습니다만, 주일 예배를 실황으로 송출하는 경우는 평화방송과 기독교 방송 등에서 서너 교회가 참가하고 있는데, 평화방송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대형교회가 단골로 참가하는 것 같았습니다. 평화방송은 예전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나머지 방송들은 설교에 초점을 두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교회들은 설교만을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개신교회 설교자들 대부분은 언제 들어도 공통점이 있었는데, 생각하게 하는 설교 또는 고민하게 하는 설교, 청중들을 변화시키려는 설교는 찾을 수가 없고, 흥미로운 주제를 가볍게 취급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주제로 삼으셨던 설교의 내용을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런 저의 생각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입니다. 율법학자들이란 성경을 연구하는 전문적인 종교 지식인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요즘말로 하면 신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인데, 우선 본문에서 언급된 내용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긴 예복을 걸치고 다니기 좋아한다 말씀하시는데, 이는 당시의 율법학자들의 겉치레와 허식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예복을 입으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인사와 존경을 받는다 생각한 때문일 것입니다. 독일 세미나에서 들은 얘기인데, 독일교회는 종교적인 행사가 아니라면 로만 칼라(Roman collar)를 입고 다니는 것을 삼가도록 가르치는데, 젊은 신학생이나 준목들은 등 하교 시에도 로만 칼라를 입고 다니고 있다면서 지방 신문 가십난에 오르내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도 인사받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오래 기도한다고 꼬집으셨습니다. 이런 비판의 배경에는 그들의 실상은 과부들의 가산(家産)을 등쳐먹는 일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우리 사회나 교회의 문제아는 지도자들임에 분명합니다. 이런 문제의 원인은 제대로 된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