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갑일지라도 갑질은 하지 말아라. / 눅 22:24-30.
묵상자료 8092호(2023. 7. 13. 목요일).
시편 시 3:1-4.
찬송 37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고 공감하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도 어려운 일입니다. 표현을 하는 사람이든 읽어내려는 사람이든,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매 순간 변하기 마련인 탓일 겁니다. 때론 눈물을 쏟으며 깊이 공감했던 글도, 또 다른 순간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신파로 보이기도 하지요. 그럴 때면 절절한 감정을 녹이는 시보다, 담담한 어조로 써 내려간 글에 더 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시인 이기철은 관조의 시인이지요. 감정을 무너트리며 분출하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쾌쾌히 무던히도 시안에 쌓아 놓습니다. 어떠한 언어로도 감정을 강요하지 않은 채로 말이지요.
“바람은 불어불어 청산을 가고, 냇물은 흘러 흘러 천리를 가네. 냇물 따라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은, 추억에 꽃잎을 따며 가는 내 마음. 아, 아 엷은 손수건에 얼룩이 지고, 찌들은 내 마음은 옷깃에 감추고 가는 세월. 발길마다 밟히는 너의 그림자. 아, 아, 엷은 손수건에 얼룩이 지고, 찌들은 내 마음은 옷깃에 감추고 가는 세월. 발길마다 밟히는 너의 그림자.”
마음이 곡의 분위기를 따라서 잔잔하게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이기철 시인은 시 안에 감정을 싣는 것을 일부러 제한하는 것 같지요? 지나치게 몰입하거나 탐닉하지 않고 자기만의 감정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숨기지도 않는 글은, 마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하나의 정밀화 같기도 하고요. 공감을 강요하거나 이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러 번 곱씹을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시인의 언어는 사실적이고 직접적입니다만, 약하다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가장 큰 설득력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이겠지요. 담담한 어조에서 가장 올곧이 감정이 전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기철 시 김동환 곡 <그리운 마음>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7월 14일 방송> 사족 : 이기철시인은 거창출신, 김동환작곡가는 청주 출신.
2. “누가 제일 높으냐?(24-27절)”과 “제자들이 받을 상(28-30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유월절 식탁 후에 주님께서 제자들과 가진 토론이었음을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하겠습니다. 몇 가지 주제가 올려졌는데, 그 첫 번째는 누가 위대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더 잘난 사람인가를 다투는 애기일 수는 없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많은 예를 드시면서 제자들의 토론을 이끄셨습니다. 첫 번째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을 예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무기로 백성들을 강제로 다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백성의 은인행세를 한다고 지적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권력자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독재자로 군림하면서도 오히려 위대한 백성의 영도자로 역사를 왜곡하는 현상이 대세인 현실입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 대안으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요즘 우리는 민주 사회를 살고 있는데, 대부분 유럽의 민주 국가 수장들은 수행원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아주 낮은 급여로 만족하는데, 그 까닭은 자신이 국민을 편안히 모셔야 할 공복(公僕)이라는 공무원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오직 선거철에만 공복 코스프레를 하는 위인들뿐인데도, 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개돼지가 돼버린 국민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러지 말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런 위선자들이 많은데, 이를 주님은 충분히 예견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시중드는 사람을 예로 드셨습니다. 누가 봐도 식탁에 앉은 사람은 세력가이고, 그를 떠받드는 사람은 하인임에 분명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물론 지금도 이런 인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용어를 바꾸어 사용하는데, 물건을 사는 사람은 갑이고 물건을 파는 사람은 을이라고 말입니다. 물건을 팔아야 할 처지의 을은 온갖 친절과 성의를 다해서 갑을 대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건을 구입하는 쪽 갑이 이른바 갑질을 한다는데 있습니다. 갑과 을 사이에 정당한 흥정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질을 할 정도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인품과 자질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모시는 예수님조차도 자신을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알아 차려야 하겠습니다. 2,000년대 중국 흑룡강성 북부 지역교회는 매우 열악했습니다. 당연히 그곳에서 일하는 교회 지도자들 역시 피난민 수준으로 말할 수 없이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지를 찾아갈 때는 각별히 복장에 주의를 기우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 선교에 참여할 때는 제 여동생이 지어 준 중국인들이 잘 입을만한 솜으로 누빈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어느 강습회가 끝난 후 교회당 마당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여성 지도자가 무리 중에서 뛰어나와 제 가슴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조용히 그리고 진심으로 그 여성 지도자를 안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께서도 이럴 경우에 그렇게 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너희는 갑일지라도 갑질은 하지 말아라.” 오늘 우리에게 들리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