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에 대한 무죄와 유죄의 의미. / 눅 23:1-12.
묵상자료 8098호(2023. 7. 19. 수요일).
시편 시 5:4-7.
찬송 41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네까레리나]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고 말이지요. 승자는 말이 없고, 패자는 항상 불평이 많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까요? 하지만 어쩌면 행복이라는 것이 그만큼 이루기 어려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수많은 작은 것들이 모여서, 행복이라는 크고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오늘 하루, 행복을 이루고 있는 조각들을 얼마나 모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는 데는 반드시 그 일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유와, 그렇게 되기 힘든 여러 가지 이유 등, 변명들이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아흔 아홉 가지의 방해가 있다고 해도, 백 개의 꼭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일은 분명 결실을 맺어야 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겠지요. 반대로 생각을 하면, 어떤 일어난 일에 대해서 그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 더 많기에 일어났다 말할 수도 있습니다. 행운을 맞이하는 순간은 무척 짧습니다만, 불행을 견뎌낼 시간은 더디 흘러가지요. 하지만 분명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빨리 체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당장은 그 시간을 견뎌낼 이유가 뚜렷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말이지요.
누군가 인생에 있어서 투덜거림은 꼭 필요하다 말하더군요. 투덜거리지 않으면 누구도 돌아보거나 잘못된 것에 대해서 보상해 주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투덜거림이 반드시 상대에게 불만이 있다는 뜻은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한번 돌아봐 달라는, 내 존재를 잊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의사 표시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명심해야 할 것은, 투덜거림 역시도 일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7월 20일 방송>
2. “빌라도의 심문(1-5절)”과 “헤롯의 심문(6-12절)”을 읽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를 실질적으로 식민 통치하는 로마가 파송한 총독이고, 헤롯은 유대의 꼭두각시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앞에 둔 이 두 사람의 재판은 여러 가지 점에서 주목을 끌게 합니다. 먼저 빌라도 총독의 재판입니다. 먼저 고발장의 내용입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선동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딱 한 마디의 질문을 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말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당신이 그렇게 말했습니다.”였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판결을 내립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아낼 수 없다. 무죄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고발장의 내용이 허위라는 것을 알아냈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될 의도나 활동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제는 헤롯의 재판으로 갑니다. 우선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예수가 행했다는 기적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으시니까 뭐라 입장을 표명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청석에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악을 쓰며 고발하니까, 그것에 힘을 입어 자기 경비병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을 준 다음에 화려한 옷(아마도 죄수복)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여론을 의식한 유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1세기의 로마 당국은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고소와 고발은 대체로 유죄를 기대하는 쪽으로 작성됩니다. 충분히 다툼의 사안임을 입증하려고 준비되었기에, 실제 내용보다 과장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법치주의를 표방하는 재판에서는 고발장에서 과장과 선동을 최대한 거둬내고, 사실만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꺼낸 빌라도의 질문은 예수 자신에게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는 질문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자칭 왕으로 행세했거나 행세할 개연성 여부를 밝히는 것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으로 변호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대로 “그 말은 당신이 한 말이오.”라고 부정하자, 빌라도는 더 이상 재판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허수아비 왕 헤롯은 이번 재판을 통해서 백성들의 여론에 편승,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되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발자들의 외침에 즉각적으로 반색을 드러내며 유죄를 선고할 뿐 아니라, 그들의 기분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조롱과 모욕을 주고 죄수복으로 갈아입힌 것입니다. 이 두 재판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자기 백성을 식민통치자 이방인 총독에게 고발했으나 무죄를 선고한 재판과, 자기 백성을 두둔하고 대변해야 할 왕이 도리어 선량한 자기 백성을 유죄로 몰고 가는 한심한 재판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법의 정신에 충실한 재판을 하였다면, 헤롯은 여론에 편승한 자기 권세의 회복에 충실하였습니다. 역사는 권력의 실세와 허세 중에서 누구에게 손을 들어줄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