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레네인 시몬이 진 십자가는 억지일까? 자원일까? / 눅 23:26-31.
묵상자료 8100호(2023. 7. 21. 금요일).
시편 시 5:10-12.
찬송 51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단원 김홍도의 <고양이와 나비>라는 제목의 그림을 봤습니다. 막 나비를 낚아챌 듯 생동감 있었던 고양이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그림이었는데요. 헌데 그 그림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고양이 발아래 그려져 있는 한 떨기 제비꽃이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보일정도로, 무척이나 작은 보랏빛 꽃이지요. 제비꽃은 한자로 여의 초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효자손과 용도가 같았던 중국의 여의라는 물건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인데요. 옛 사람들은 김홍도처럼 그림에 제비꽃을 그려 넣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가려운 곳을 마음먹은 대로 긁을 수 잇게 했던 물건, 여의를 닮은 꽃이기에 그림에 제비꽃을 넣으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어두운 겨울 다 지나고, 태화강 언덕 풀 빛 짙어올 때. 비단 치맛자락 끌고 오시는 이, 님의 걸음걸음 꽃신을 밟히올 제비꽃으로 필까? 그리움도 푸르게 젖는 따스한 봄 날, 타오르는 아지랑이, 강물 따라 흐르며 부르는 소리. 사랑은 아름다워. 죽도록 아름다워.”
화려하게 눈길을 끄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제비꽃은 특별할 것 없이 그저 수수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 같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걸을 때에야 눈에 띄는 꽃, 그렇기에 제비꽃을 만나는 일은 뜻하지 않는 순간에 희망이나 생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과도 조금은 비슷하지 않나 합니다. 이 곡에 시를 쓴 김석규 시인은 유치환의 추천으로 1967년 등단을 했습니다. 시인은 흙에서 나고 자라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로 글을 써왔습니다. 덕분에 그의 시는 비슷한 추억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감싸주는 역할을 해 왔지요. 김석규 시, 김준범 곡 <제비꽃>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7월 21일 방송>
2.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1(26-31절)”을 읽었습니다. 세상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모순 또는 아이러니가 제법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십자가입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의 목에 걸고 다니는 목걸이 중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유난히 많습니다.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1세기에 십자가는 베니게 칼타고 이집트 로마에서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무서운 형벌의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형벌로 다스리는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악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일벌배계(一罰百戒)의 효과도 있었겠지만, 사랑을 근본정신으로 삼는 종교재판의 아이러니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십자가 형벌을 받기 위해 골고다라 불리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님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조연자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엉겁결에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행운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가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나(막 15:21) 자원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뒤를 가까이서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조사해 보니까, 그의 아들 루포는 훗날 바울 사도의 동역자가 되었고, 그의 아내는 바울이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의 관계였습니다(롬 15:13). 이렇듯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사람 시몬은 훌륭한 신앙의 가정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십자가를 질 수도 없으려니와, 십자가를 짊어진 부모에게는 그 가족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걸으셨던 길을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부르는데, 라틴어로 “슬픔의 길” 또는 “고난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이 비아돌로로사를 걸어가시면서 14차례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그것을 기념해서 현재 그 자리에는 14개의 간이 기도처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불과 800m의 짧은 길이지만, 무거운 십자가를 메신 주님께는 견디기 힘든 슬픔과 고난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뒤를 따르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기를 낳아보지 못하였거나, 젖을 빨려보지 못한 여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산을 보고 우리 위에 무너져내려라고 하거나, 언덕을 보고 우리를 가려달라고 할 것이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 인생의 무게가 주님을 위해서 울어드릴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들 발등에 슬픔과 고난의 불덩이가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냉담함을 탓하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고난의 짐을 지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두 번째 말씀은 저주와 슬픔의 날에는 그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지진이나 산사태가 일어나 우리를 덮어버리기를 소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난당하시는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상태에서도 우리들 인류를 걱정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참 사랑의 진면목을 깨우쳐 주시는 대목입니다.
3. 아산의 삶은 은혜가운데 평온한 일상입니다. 안부를 물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세면대의 마개(판업)을 열흘 만에 빼내고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묵상식구 여러분의 삶의 자리도 주님의 평화와 소확행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