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부활사건. / 눅 23:56b-24:12.
묵상자료 8104호(2023. 7. 25. 화요일).
시편 시 7:1-2.
찬송 15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름은 사계절 가운데 가장 자연을 즐기고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도 봄과 가을 겨울은 꽃이나 낙엽 눈으로 그 계절만이 지닌 정취를 즐길 수 있게 하지만, 여름은 그에 비해 썩 그렇지 못하지요. 감당하기 힘든 더위를 온 몸으로 느끼고 체감하느라 자연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좀처럼 부족한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선조들은 피서라는 것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게 되지요. 더위를 피한다는 것을 핑계로, 1년 중 가장 생기 넘치는 여름의 자연을 한껏 즐기고 만끽하는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연 속에서 쉼 없이 달려온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도 주면서 말이지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저 산은 나를 보고 변하지 말라하고, 저 산은 나를 보고 다 잊고 살라하네. 미움도 벗어놓고, 집착도 벗어놓고,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가라하네. 미움도 벗어놓고 집착도 벗어놓고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가라하네.”
하나의 시에 여러 명의 작곡가의 곡이 존재할 경우에, 비교하며 듣는 즐거움을 더불어 얻을 수 있지요. 같은 시이지만 작곡가에 따라서 이러한 음악적인 어법으로 읽어낼 수 있겠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같은 시에 곡을 붙인 한지영의 <청산은>이 한 예이겠지요. 여러 현대 시인들이 비슷한 제목의 시를 발표를 했고, 또 여러 작곡가가 또 그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만, 유독 청산을 테마로 한 가곡들은 모두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도 문학작품 속에 자주 등장을 하는 청산의 이미지가 모두 비슷한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면서,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 주는 그러한 존재로 말입니다. 나옹 스님 시 김동환 곡 <청산은 나를 보고> 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7월 25일 방송>
2. “부활하신 예수(1-12절)”을 읽었습니다. 모태신앙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문자 그대로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저와 같은 경우인데 이런 신앙이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녔고, 가정예배를 드렸으며, 미션계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같은 신앙인과 결혼도 하였습니다. 이런 모태신앙이라는 분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위 뜨듯 미지근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이지도 열광적이지 않은 고만고만한 신앙생활 말입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처럼, 깊은 번민이나 갈등 없이 그저 수도 없이 들어온 신앙얘기를 체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논쟁이 생겨도 선뜻 나서지를 못합니다. 두루뭉술하게 생활해온 탓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읽어도 눈이 커지거나 정신이 번쩍 드는 그런 기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끄덕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나 도마 같은 질문 잘하고 의심하는 사람을 보고는,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열외로 분류해 버리곤 합니다. 그러다가 한 분의 설교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솔직한 의심 속의 믿음”이라는 설교였는데, 무조건 아멘 할렐루야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심할 수 있을 때까지 의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의심할 수 없는 저 건너편에 이르러 믿음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이 했다는 말인데, 사람은 이성을 도구로 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도구로만 삼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의심의 끝은 믿음에 이른다고 말입니다.
주님이 무덤에 묻히신 후 사흘 째 되는 날, 유대인의 관례대로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향료를 들고 무덤을 찾았습니다. 우리나라의 풍습에도 삼우제(三虞祭)라는 것인데, 장례 당일엔 초우(初虞)를, 둘째 날엔 재우(再虞)를, 셋째 날엔 삼우(三虞)라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굴을 파서 만든 무덤에 안치한 시신에 향유를 뿌리는 전통이 있었는데, 열성적인 여신도들이 향유를 들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시신을 볼 수 없었고,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살아나셨으며 갈릴리에서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나 사흘 만에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 세 여인은 이 사실을 제자들과 그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알렸으나, 헛소리로 알아듣고 믿지 않았으나, 베드로만 벌떡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확인한 후, 어떻게 된 일인가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부활 사실에 확신에 차서 기뻐하거나 감격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부활, 다시 살아남이란 인류 역사에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인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부활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믿음의 영역에서만 이해되는 말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