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성경에서 예수 정신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 막 1:29-45.

박성완 2023. 7. 31. 00:00

묵상자료 8110(2023. 7. 31. 월요일).

시편 시 8:3-5.

찬송 45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칼 검()은 오랜 세월동안 영물로 여겨졌습니다. 사람의 손을 통해 휘둘러지지만 스스로 신령스런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이름난 무인들을 검을 동지라 부르고 그 검의 이름을 따로 붙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아호를 고르듯 오랜 시간 심사숙고하면서 말이지요. 뛰어난 검은 제 주인을 알아본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칼의 울림소리를 통해서 말이지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찾고 그에게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것, 어쩌면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지 않을까요?

    나를 이롭게 하는 사람, 내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은, 어쩌면 타고나는 본능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지요. 받은 만큼 사랑과 정성을 되돌려 주려는 그 마음까지도 말입니다. 말문이 트이지 않은 갓난아기조차도,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람을 신기하게도 알아내고 환하게 미소 짓지요. 공연하게 마음이 쓰이고 자꾸 떠올리게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그에게 받은 마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본능, 그 마음의 눈이 그릇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지요.

    세월이 주는 지혜란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깨닫게 되는 것이 늘어 간다는 것일 겝니다. 그래서 사람을 알아보는 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차 밝아지는 것이겠지요. 누군가와의 인연은 그가 남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시작됩니다. 반대로 인연의 끝은 결국 남이었구나로 귀결되지요. 누군가가 갑자기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나, 특별하던 사람이 타인으로 느껴지는 것, 모두 조금은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대로 하루하루 안부를 묻고 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의 무게는 조금 덜어지는 기분이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83일 방송>

 

2. “많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29-34)”, “전도여행(35-39)” 그리고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40-4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과 셋째 단락입니다. 지난 금요일 저의 아산 집을 방문한 친구들은 저의 묵상을 정독하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흠정역본을 좋아할 뿐 아니라 신구약 성경을 원어로 읽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이고, 또 다른 한 친구는 제가 보낸 자료를 얼마나 자주 반복 사용하는지를 확실하게 기억할 정도로 하루도 빠짐없이 백업을 받아둔다 했습니다. 또 다른 두 분 역시도 자신의 분야에서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사는 분들입니다. 이렇게 장황스럽게 친구 자랑을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성경의 큰 줄기 작은 줄기를 무시하고 한 편의 성경 본문을 얼마 뒤에”, “엄하게 이르셨다.”라는 등의 제목으로 설교해서는 안 되겠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앞서 예로 든 설교 제목과 비슷한 설교를 여러 번 확인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제목으로 연상할 수 있는 설교 내용이란 무엇일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중심점을 주제로 찾아내야 하고, 그 주제를 요약한 것이 제목이어야 하는데, 문장을 연결하는 데 사용하는데 사용하는 접속사나, 문장을 돋보이게 하는 부사를 중심주제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 내내 기다렸을 교우들에게 그렇게 흥미위주로 설교 제목을 뽑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첫 단락은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일화로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알고 찾아가 고쳐주신 것과,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각색 병자들과 미친 사람들을 예수께 데려왔는데, 주님은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고쳐주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약이나 주사가 아니고 몇 마디 말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따지듯 열불을 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령 예수 시대는 의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무당 굿거리 하듯 질병을 고치셨다.” 라던가, “이런 신비적 치유기적은 종교행위에 불과할 뿐이다.”고 시니컬하게 넘기는 모습들 말입니다. 역사적 실존인물인 예수를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과연 기독교의 가치는 보존될까 궁금해질 수 밖입니다. 다행이게도 전영창 교장님(거창고)이나 원경선이사장님(풀무원) 같은 분을 통해서, 예수정신을 실천하신 사표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애매모호한 기독교 신앙을 우리들 삶 속에 부활시킨 분들이었습니다. 80년대 초기 의정부 회암리의 풀무원에는 기둥마다 욕심 뽑기라는 글자를 붙여두고 깨끗한 공동체 생활을 힘쓰고 있었고, 60년대 초기의 거창고등학교에서는 대학시험을 목전에 둔 학생들에게 농촌 계몽운동(문맹퇴치)과 노천 강변에 어린이 주일학교를 8개나 만들어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예수 정신은 구호나 이상(理想)만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에서 진행 중인 삶이었습니다. 어느 핸가 웅양면 어느 비탈 마을에서 한센씨 병을 앓는 분들과 함께 드린 성탄절 축하예배는 예수 정신을 일깨우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8111(2023. 8. 1.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