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가 먼저냐? 병고침이 먼저냐? / 막 2:1-12.
묵상자료 8111호(2023. 8. 1. 화요일).
시편 시 8:6-9.
찬송 50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학창시절 캠퍼스 커플이었거나, 취업 후에 사내(社內) 연애를 통해서 결혼에 이르는 사람들에게는 장단점이 있다고 합니다.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관계에 있어서, 굳이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반면에 단점은 이런 것이겠지요.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는 부분까지,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들어날 수밖에 없는 점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겠지요. 절대 배반하지 않는 동지를 하나 얻는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쉴 새 없이 출렁이며 흘러가는 저 강물. 저녁 햇살에 반짝이며 떠가는 추억이여. 그리움에 설레던 지난날은 가고 없어도. 잊는다는 것은 아름다워라. 마음 아파도 아름다워라. 정처 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강변에 서 보면, 누구라도 강물 되어 둥둥 떠가지 않으리. 내 마음 외로워 저무는 강가에 홀로 서면, 나도 따라 흐르네. 강물 되어 흘러가네.”
유려하게 이어지는 곡의 전개가 깊고 그윽하게 흐르는 강물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작곡가 김광자는 작품 집 [꿈을 따라갔던 일]을 통해서, 가곡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지요. <그대는 내 사랑의 시>와 같은 드라마틱한 곡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만, 가장 깊은 조화를 만들어 내는 곡은, 부군은 성악가 김 요한이 연주한 작품들입니다. 조병화 시에 곡을 붙인 <들녘>이나 박목월 시에 작곡을 한 <갈무리> 같은 곡이 그렇지요. 부부란 가장 친밀하면서도 그렇기에 더욱 긴장의 끈을 받쳐 줄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증명하듯이, 작곡가 김광자와 베이스 김 요한이 함께 작업한 곡에선 정진한 완성도가 느껴집니다. 박수진 시 김광자 곡 <강물 되어> 들으셨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8월 4일 방송>
2.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1-12절)“을 읽었습니다. 모든 이들의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요? 학생부를 지도할 때 중고등학생들이 가장 자주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수들입니다. 대학시절 저의 룸메이트는 교육학과인지 도서관학과인지 기억이 되지 않지만, 그 친구는 한 학기 내내 그룹 미팅으로 분주하게 지냈습니다. 스폰서가 교사인 큰 형님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성적이 저조한 것을 보고 휴학을 시켜서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복학을 했다며 머리를 긁적거리며 해후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선순위에서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만나신 사람들은 가난과 질병의 노예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돕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과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1순위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돕는 일을 쉴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먹을 것을 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침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주님을 찾았는데, 사람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어서 그들의 양보를 받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눕힌 담요의 네 귀에 줄을 달아 밑으로 내린 것입니다. 이 장면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그들의 절실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중풍병이란 현대의학에서도 난치병으로 분류하는데, 뇌혈관 장애로 인한 질환 및 사고의 총칭으로, 일반적으로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순환장애가 일어나 갑자기 의식 장애와 함께 신체의 반신에 마비를 일으키는 병이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사 몇이 말하기를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모독하는가? 하나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너는 용서받았다는 말과, 네 요를 들고 걸어가라 하는 것이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이 인자에게 있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신 후 “일어나 네 요를 걷어가지고 집으로 가거라.”고 말씀하실 때,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요를 들고 나갔던 것입니다. 죄의 용서가 먼저냐? 아니면 질병을 고치는 것이 먼저냐? 의 문제는 본문에서 그 해답이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이 인자에게 있는 것을 보여주겠다.”라고 말씀하신 후 “일어나 네 요를 걷어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신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들 죄인의 입장에서는 죄의 용서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죄를 고백해야 하고, 그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용서가 가능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고맙게도 본문의 중풍병자는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왤까요? 그들이 지붕을 열고 주님 앞으로 내려올 때,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가는 믿음이 모든 허물에서 용서를 잉태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