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성경말씀에 근거해야. / 막 11:12-26.

박성완 2023. 9. 4. 00:00

묵상자료 8145(2023. 9. 4. 월요일).

시편 시 18:4-6.

찬송 2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밤은 참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밝은 햇빛 아래서 낮 동안 잊고 있거나 작아졌던 감정이, 깊은 밤 표식도 없이 더 크고 생생하게 살아나고 말지요. 수줍기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크나큰 용기를 내고, 거칠던 사람이 여린 감정의 코를 들어내는 것, 이 모든 것은 밤의 분위기 때문일까요? 유난히도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러오는 밤의 공기 때문일까요? 그렇기 때문에 작곡가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야상곡(夜想曲)이라는 제목으로 곡들을 완성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귀리귀뚤 귀뚜리, 님 그리는 그 노래. 사리사리 싸르락 님이 오는 소리. , 이 한밤, , 이 한밤. 너와 나 이 마음을 어이하리. 밤새도록 잠 못 이루는 귀뚜리 노래여. 귀리귀뚤 귀뚤이, 님 그리는 노래. 사리사리 싸르락 님이 오는 그 소리. 귀뚜리 노래여. 스리스리 스르렁 님을 찾는 그 소리. 두리두리 두둥실 님을 만난 그 노래. , 이 한밤. , 이 한밤, 너와 나 이 마음을 어이하리. 밤새도록 잠 못 이루는 귀뚜리 노래여, 스리스리 스르렁 님을 찾는 그 소리. 두리두리 두둥실, 님을 만난 그 노래. 귀뚤이 노래여.”

    흔히 <야상곡> 하면 먼저 쇼팽이나 드뷔시의 이름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만, 우리 가곡으로 완성된 이 곡 역시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야상곡은 밤의 분위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곡을 통칭하는 말이지요. 때문에 야상곡은 서정적이고 사색적이어서 마치 음악으로 만들어진 시 낭송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의 밤하늘에서 영감을 얻어 한국적인 야상곡을 완성한다면, 바로 이러한 느낌이겠구나 싶은 곡을 글쓴이와 작곡가는 완성을 해 냈지요. 정원섭 시 김봉천 곡 <야상곡>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94일 방송>

 

2. “저주받은 무화과나무(12-14)”, “성전에서 쫓겨난 상인들(15-19)” 그리고 믿음의 힘(20-2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셋째 단락입니다. 제게 이 셋째 단락은 아마도 평생 기억에 남을 일화를 제공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00여명의 목사님들이 모인 베델성서 강습회에서 대전에서 올라오셨다는 흰 머리가 성성한 노인 목사님이 번쩍 손을 들고 일어나셨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저의 강의가 말씀을 강조하고 있었는데, 그 보다는 기도를 강조해야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용했던 성경구절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 뒤로 TV설교자들 대부분이 그 노인 목사님과 같은 취지로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새롭게 불고 있는 기도운동의 핵심도 예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른바 기도 만능주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자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무신론자인척 하는 사람까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나름의 기도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금정산에 가면 70인 바위라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몇 분 장로님들이 저를 끌다시피 해서 70인 바위 철야기도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올라가는 도중에 구석구석에 많은 기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두 개의 촛불을 밝히고 작은 제단을 꾸미고 그 앞에서 정성을 다해 손을 비비며 뭔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대부분의 인생들은 기도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삶이 고단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질 않는데서 오는 무력감이 기도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무력감이 기도하게 만든다는 것은 순기능일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겸손해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력감이 들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론을 얘기합시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기도자로 살고 있습니까? 오직 소원을 비는 무당들의 기도를 따라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절간에서 들려오는 스님들의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천리교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이슬람교도들의 기도입니까?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우리 삼신할미께 드리는 기도입니까? 우리 기독자들이 드려야 할 기도는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무작정 어느 길이든 남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보다는 더 나은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훌륭한 주기도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르친 선교사들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주기도로 정화(精華)하라고 가르쳐주기까지 했습니다. 셋째 단락의 주제는 믿음의 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성경에 기초한 기도를 드릴 뿐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믿음을 따라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힘입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