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세계 : 산 자들과 교제하시는 하나님. / 막 12:13-27.
묵상자료 8147호(2023. 9. 6. 수요일).
시편 시 18:10-12.
찬송 16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연이나 학연을 우대하는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난 하면서도 사람들은 쉽게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같은 땅이나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고, 또 비슷한 추억을 공유한 사람에게, 더 마음이 쓰이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그 이유만으로 변명이 되지는 못할 테지만 말입니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 생활해 보지 않은 사람은, 향수라는 말이 지닌 서러움과 고독을 짐작하지 못하겠지요. 배가 불러도 늘 마음이 허기가 지는 그 쓸쓸한 기분을 말입니다.
“저 산 너머 흰 구름 아래, 내 고향 있을 듯싶어. 영영 기다려 지친 몸, 이제는 잊었나. 가녀린 손길에, 그대 가슴 깊이 안기고 싶소이다. 푸르른 풀밭에 안기어서, 봄을 노래하던 그 때가 그리워. 진정 가슴이 아프오. 저 산 너머 흰 구름 아래에, 내 고향 있을 듯싶어. 영영 기다려 지친 몸, 이제는 잊었나. 돌아 올 이내 몸을 잊어버렸나. 정답게 뛰어놀던 그 때 그리워, 쳐다본 하늘에. 말없이 어둠이 짙어지니, 눈물만 흐르네.”
향수(鄕愁)는 오히려 우리나라보다는 중국이나 미국 러시아처럼 땅이 넓은 나라에 더 어울리는 감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만큼 동양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 거고, 또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그 어느 사람과 견주어도 작지 않다 느껴지곤 합니다. 나고 자란 땅, 그 곳이 지닌 의미를 유독 깊이 새기는 우리 민족의 특징이겠지요. 어쩌면 의지만으로도 닿을 수 없는 북녘 땅이 존재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일주일이나 남은 추석의 명절 기분이, 더 이르게 찾아오는 듯합니다. 고 은산 시 최영섭 곡 <망향>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9월 6일 방송>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13-17절)”과 “부활에 대한 토론(18-27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은 우리들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숙제가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거의 300회에 가까운 신약성경 공개강좌를 한 이력이 있습니다. 처음엔 한 주간을 그 다음에는 3일간을 신약만 강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가장 곤욕을 치른 게 요한 계시록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와 요한 칼뱅은 성경을 주석한 사람으로 유명한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요한 계시록만은 주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정경화의 과정에서 가장 늦게 편입될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많았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될 때까지, 초기 의 주요한 교부들의 저작물에 요한 계시록을 거의 인용하지 않았는데 반해서 몬타누스와 천년 왕국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강조되고 있는 점 등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곤 합니다. 저의 고등학교 동기 중에 북한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작년에는 날을 잡고 저의 집을 찾아와서 하룻밤을 묵으며 계시록을 공부하다 간 일이 있는데, 그 때 저는 계시록의 구조와 의미를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사후 세계 이른바 천국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질문자로 나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후(死後) 세계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이른바 수혼법(Levirate Law)을 성경에서 말씀하는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수혼법/受婚法(신 25:5-10)이란 것이 일찍부터 유대사회에 정착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랍 세계에서 흔히 통용되고 있는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형제를 대신해서 형제들이 아들을 낳아주는 관습을 말하는데, 이는 죽은 자의 명예를 세워주기 위함이며, 또한 아들을 낳아 자손을 잇게 하려는 사회적인 장치였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바로 이 수혼법의 약점을 앞세운 것입니다. 본문에서처럼 일곱 형제의 맏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을 때, 여섯 동생들이 형수와 아들을 낳기 위해 차례로 관계를 맺었는데, 모두가 실패하였을 때 부활 후 그 형수는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지 않느냐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에서 우리는 사후 세계에서의 인간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데서 오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입니다. 부활 후에는 결혼하는 일이 없고 천사들처럼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저 유명한 모세가 소명을 받던 가시떨기 나무 사건을 소환하십니다. 그때 주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라.”고 해석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지상적인 삶에서 초월적인 삶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은 죽은 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 안에서 살아있는 자들이며, 그래서 그들은 죽음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여전히 부활의 약속아래 있는 산자들로, 하나님은 그들과 여전히 생명의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뜻이겠습니다(그닐카, 국제주석 마르코복음(2), pp.214-217).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