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하나님은 배신자를 통해서도 심판하신다. / 왕하 9:17-37.

박성완 2023. 10. 13. 00:00

묵상자료 8184(2023. 10. 13. 금요일).

시편 시 23:4-6.

찬송 22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암탉은 여느 때와 달리 알을 낳게 되면 울음소리를 작게 하고 둥지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둥지에 가보면 막 낳은 하얗고 따끈한 달걀이 놓여 있다고 농부들은 말을 하지요. 농부들은 달걀을 거두어 가면서도 그 자리에 늘 하나는 남겨둡니다. 밑알을 만들기 위해서인데요. 밑알이 없으면 암탉들은 누군가 모두 가져가 버린 것을 눈치 채거나 어디에 알을 낳아야 할지 몰라서, 알을 낳지 않는다고 합니다. 꼭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농부가 밑알을 남겨두는 이유는 그런 것 아닐까요? 최소한의 가능성이나 희망은 남겨두는 것 말입니다.

    닭에게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서 하나의 밑알을 놓는 것은, 닭의 입장에서 보면, 참 인정 사나운 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닭은 하나의 알이라도 둥지에 남아 있으면, 몇 개를 낳았는지 몇 개를 잃었는지, 분명하게 기억하지를 못한다고 하네요. 그저 하나의 알이 남아 있는 그 자리만을 기억하는 거겠지요. 그 둥지 안에 알이 놓여 있다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냥 보통의 날이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때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아무도 상처받는 사람 없이, 함께 평화로운 날들을 이어갈 수 있다면 말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1013일 방송>

 

2. “예후의 반역(17-37)”을 읽었습니다. 배신의 역사를 조사해 보니 역시 그 최고의 자리에는 가룟인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별로는 투르크 민족이었는데, 그들은 영국에게서 그리고 미국에게서 철저하게 배신을 당한 비운의 국가였습니다. 이렇듯 배신이나 배반은 한 때는 절친 이었고, 평생을 함께 가자고 맹세까지 한 사이들이지만, 어느 순간 한 쪽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그 관계에 금이 생기고 철천지원수가 되어버린 경우들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물질이나 명예 또는 권력에 의해서 이합집산을 하다가는 배신이라는 슬픈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부는 물론 부모와 자식 간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후의 경우는 많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그는 왕이 될 야심을 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공식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기름 부으셨고, 또 그에게 배신의 길을 걸어가도록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사람들 사이에서 있어서는 안 될 배신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잘못된 약속과 맹세를 할 수 있습니다. 나라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잘못된 것이란 이해관계에서 득실을 따져 유리하다고 생각될 때 맺는 약속이나 맹세들입니다. 영국도 미국도 그런 약속들을 투르크 민족들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득실에 의한 약속들은 믿을 것이 못되는 얄팍한 것들이었습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바로 눈앞만 살핀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배신의 날이 무르익어가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1980년 대 중반기에 <가룟인 유다와 막달라 마리아> 라는 연극이 상연된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저희 교회에 한 미국 신학생이 교회 실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학생과 같이 공연을 보았습니다. 줄거리는 가룟인 유다의 배신의 정당성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가룟인 유다는 로마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던 열심당의 일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는 백성들을 선동하기에 매우 유능한 종교인으로 비춰집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당의 일원인 것을 감추고, 열심히 예수를 따라다니다가 신임을 얻게 되고 예수님 일행의 돈주머니를 맡게 됩니다. 그의 헌신은 얼마나 대단했느냐면, 그의 약혼자인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께 소개하고 연인 사이로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이것은 그 연극의 주장입니다). 가룟인 유다의 충성심을 엿보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생각과 행동은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적대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관심사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룟인 유다는 예수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상이몽을 한 셈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들 모두는 동상이몽을 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후가 그에게 맡겨진 배신의 임무를 얼마나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람이 시리아 군과 싸우다 부상을 당하여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유다 왕 아하시야가 문병을 오는데, 예후는 그를 죽여 나봇의 포도밭에 그 시체를 던집니다. 그리고 도망치는 유다 왕 아하시야를 추격해서 화살에 상처를 입은 그를 므깃도에서 죽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세벨을 찾아가는데, 창밖을 내다보는 이세벨을 자신의 내시들로 하여금 떨어트리게 하고, 개들이 이세벨의 시체를 뜯어먹고 머리와 손발만 남았다 보고받습니다. 슬프게도 한 때는 동지였던 가까운 사람의 배신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