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절망과 수치 그 깊음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 / 렘 38:1-13.

박성완 2023. 11. 2. 00:00

묵상자료 8204(2023. 11. 2. 목요일).

시편 시 28:1-3.

찬송 40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사랑은 특별한 훈련을 하지 않고도, 타고 나는 본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이, 누구나 의사결정에 있어서 가장 먼저 자신을 주체로 삼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한 사람들이 가장 깊이 타인을 배려하는 때는 사랑에 빠진 바로 그 순간 아닐까요? 나보다 먼저 누군가를 떠올리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땐 고통에도 특히 둔감해지지요. 그래서 사랑이 끝난 후에, 사람들은 더 깊은 아픔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그대에게 가리다. 이 가을 다 가기 전에 가리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꿀 따는 나비처럼 가리다. 황금 들판 구수한 연기 노을 빛 웃음 웃으며, 그대 가슴 뜨거이 뜨거이 다가가리다. 이 찬란한 계절 눈물 말끔히 씻고, 파란 하늘 고운 숨결로 그대에게 가리다. 내 그대에게 가리다. 이 가을 다가기 전에 가리다. 달빛 따라 햇빛 따라 넘실대는 파도처럼 가리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풀잎에 이슬 맺히듯 그대 가슴 뜨거이 뜨거이 다가가리다. 이 찬란한 계절 눈물 말끔히 씻고 파란 하늘 고운 숨결로, 그대에게 가리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을 그리는 여주인공의 오페라 아리아 같은 곡입니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라는 제목에서 가을이란 계절만이 지닌 깊은 서정을 느낄 수가 있지요.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은 많고, 그를 제약하고 붙잡는 것도 많아서 이 가을 사람들의 마음은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절도 그리고 그 모든 다른 것도 영원한 것은 없지요. 이내 곧 또 다른 새로운 무언가가 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을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최향숙 시, 하우주 곡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1023일 방송>

 

2. “예레미야가 웅덩이에서 살아나다(1-13)”을 읽었습니다. “알 수 없어요.”라는 시를 발표한 만해 한용운은 호기심 넘치는 소년처럼 자연의 심오한 운행에 대해서 궁금증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오동잎의 떨어지는 모습에서 누군가의 발자취를 궁금해 하고,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궁금해 합니다. 돌부리를 스치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서 누군가의 노래를 궁금해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궁금증을 품었습니다. 그러다 누구도 받아주지 않고 귀찮아하는 큰 소리에 궁금증이 싹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견디기 힘든 시련을 주신다 생각하면서도, 왜 그러실까? 궁금해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어머니의 품이 그리운 갓 태어난 쌍둥이를 남겨두고 사랑의 하나님은 그 어머니를 데려가실까? 궁금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그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단편소설이 저 유명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우리는 소위 시련과 역경이라는 것을 맛보면서 우리들 삶에 촘촘히 배어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으러 묵상하는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열기를 바랐습니다. 비록 듣기 힘들고 감당하기 쓰린 말씀일지라도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피신하는 것이 생명에 위험하다고 외치며, 오히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게 하는 일까지도 하게 하시니,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가령 구한말 로마 가톨릭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북경에서 서양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받고, 조상 제사를 우상 숭배라 반대했을 때, 당시 정치이념인 유교사상에 반대한다 하여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최기복 한양대 교수의 논문 천주교회의 유교재례 금령과 다산의 상제례관을 보면, 독실한 신자였던 다산 정약용이 목숨을 구걸하듯 기독교 신앙을 배신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로마 교황청을 설득하는 절충안이 된 혜안을 가진 분이었음을 뒤늦게 변호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의 칙령 중에는 서양의 문화를 강조하는 것이 선교에 방해가 되는 것임을 지적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관혼상제에 관한한 문자적 해석보다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의 수혼법(25:5-10)이나 고르반 전통(7:9-13)처럼 말입니다, 문자적으로 무조건 거부하는 것보다는 이해 설득이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는 예레미야의 주장은 민족 배신자로 지탄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현실적 심판이라는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달아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겪는 것도 이해불가일 수 있으나, 그보다 더 심한 나라의 멸망과 포로로 붙잡혀 가는 수치를 목도(目睹)하는 일은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