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와 대중이 다른 점. / 느 13:4-22.
묵상자료 8220호(2023. 11. 18. 토요일).
시편 시 31:16-18.
찬송 8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양한 문인들의 작품을 접하다보면, 글을 쓰는 성향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문인들은 기존에 흔히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단어를 찾거나, 그 만의 스타일로 문장을 완성해 냈지요. 또 어떤 문인들의 글은 새로울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단어들의 나열인 것 같습니다만, 읽다보면 마음이 탁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아마, 시인 엄 원용이 쓴 글은 후자가 아닐까 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단어들 안에서 시인은 깊이 숙고해서 말을 고르고, 마음을 사로잡는 글을 꾸준히 완성해 왔습니다.
“솔바람 부는 소리 님의 숨결 실어오나/ 들에 핀 들꽃 향기 님의 얼굴 담아오나/ 속절없이 가버린 내 님아 들에 핀 들꽃 향기 속절없이 가버린 내 님아/ 솔바람 소리 좋다 하시더니 솔바람 소리 되어 오시는가/ 들꽃 향기 좋다하시더니 들꽃 같이 피어 오시는가/ 솔바람 솔리 들리고 들꽃 피어오르는/ 그대 떠난 자리에 홀로 서면/ 솔바람 소리 들꽃 향기/ 그리움 넘실대는 나의 가슴 보듬으며/ 꽃이 핀 숲에 나가 님의 얼굴 떠올리면/ 야속하게 가버린 내 님아/ 솔바람 소리 좋다하시더니 솔바람 소리 되어 오시는가/ 들꽃 향기 좋다하시더니 들꽃 향기 피어 오시는가/ 그대는 가고 없어도 숲속 푸르던 그 대 떠난 자리에 홀로 서면/ 떠오르누나 그대 모습”
지나가는 향기만으로 오랜 추억만으로 되새겨지는, 흑백의 잔영(殘影) 같은 마음을 시인은 글 안에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움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감정도 여러 가지여서, 뜨겁고 열렬한 그리움이 있다면, 이처럼 옅게 추억할 수 있는 다른 그리움도 있음을 시인은 알고 있는 듯도 합니다. 엄 원용시 이 한용 곡 <님 그리워>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11월 18일 방송>
2.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오다(4-22절)”을 읽었습니다. 삶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나, 역사의 방향을 트는 일은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인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삶의 목표에 대해서 고민하고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편한 길을 따라가는 속물근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속물근성을 잘 알고 있는 정치가들은, 그것을 십이분 활용하려고 합니다. 이른바 대중 영합주의 포퓰리즘을 악용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논리보다는 감성에 의존해서 거대한 물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가 바벨론 황제 아닥사스다를 만나러 잠깐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을 때, 여러 가지 문제들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술을 빚는 사람들, 나귀 등에 곡식 단을 실어 나르는 일, 포도주와 포도송이 무화과 등을 예루살렘으로 날라 들이는 일, 심지어 두로 사람들은 안식일에도 생선 등 갖가지 상품을 예루살렘으로 들여오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을 지킬 때, 율법을 듣고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이 그 약속을 다 잊어버리고 옛날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대중이나 민중이라는 일반인들은 역사의 방향에 대해서, 신앙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진정성을 갖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무슬림 지역에서 선교하던 한국 외대 아랍어과를 졸업한 김선일 선교사(1970-2004년)는 이들에게 붙잡혀 참수당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지켜본 일이 있었습니다. 젊은 목사와 간호사도 그들에 의해서 살해당했습니다. 그때 많은 한국 국민은 물론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 볼멘소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정부가 외교력을 발휘하거나 귀국시키기 위해서 쓴 비용을 그들에게 물리게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대중 혹은 민중의 의식 수준입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친 역사적 사실들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정립하려고 목청을 돋우었던 지도자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모세나 사무엘 예레미야나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이 절실했다는 말입니다. 만에 하나 다수 결의에 의해서 역사의 방향을 정하자고 한다면, 틀림없이 우리가 타고 있는 한국호(韓國號)는 산꼭대기로 올라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길목마다에서 필요한 지도자들을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중 영합주의자들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