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한 일에도 훼방꾼이 있는 까닭. / 스 5:1-24.
묵상자료 8226호(2023. 11. 24. 금요일).
시편 시 32:12-14.
찬송 45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무릇 위대한 몽상가와 시인들은 매순간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고 있다. 매일 아침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에 찬사를 보낼 수 있다면, 물론 생이 지루하다고 느낄 겨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몽상가나 시인보다는, 그저 범인에 불과한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요일 밤이 시각쯤이면, 그저 오늘이 금요일이나 토요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하고요. 하지만 예술가들이 상상하지 못할 보통 사람의 눈에만 보이고 누릴 수 있는 삶이란 것도 있습니다. 각자의 생이란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면 그 뿐이 아닐까요?
“그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편하게는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친구나 이웃에서, 또 최고의 생을 누리며 살 것 같은, 재벌 과학자 배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꿈꾸는 최고의 삶은 꽤 다양한 범주이겠지요. 누군가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지금 현재 내 삶에서 결여된 부분을 그가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공무 중 부상은 하나의 큰 오류를 늘 범하고 있습니다. 선망의 대상은 현재 내가 누리고 모든 것들을, 다 충족하고 있을 거라는 치명적인 오류 말인데요.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만하면 괜찮겠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갈 뿐이겠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11월 23일 방송>
2. “사마리아인이 방해하다(1-24절)”을 읽었습니다. 요즘은 기억력에도 문제가 생겼지만 며칠 전에 읽은 성경 본문도 새로운 말씀처럼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묵상식구 중에는 까칠하게 따지는 분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력 마지막으로 갈수록 어려움이 생깁니다. 어떤 해에는 4-5주일을 건너뛰어야 하는데, 그럴 때는 마지막 셋째 혹은 둘째 주간에는 겹치는 본문들이 많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게 해서 생긴 것으로 제가 선택 가능한 본문 중에서 택하다 보니까 오래 전에 묵상했던 본문과 연관된 것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개축하려고 할 때 협력을 가장한 제의를 했지만, 이를 거절하자 노골적으로 방해공작을 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사마리아는 앗수르와 결혼동맹을 맺은 이후로, 남왕국 유다 인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상종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면, 유다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 자발적으로 성벽을 수축할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포로가 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포로에서 귀환해서 성벽을 개축하려고 하자, 무슨 뚱딴지같은 선심을 쓰면서 협력하려고 했으니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은 참 간사하고 음흉하기 짝이 없습니다.
엊그제 월드컵 아시안 예선전이 중국에서 열렸는데, 우리 국대가 3:0으로 쾌승을 거두었는데, 중국 응원팀 속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합니다. 토트넘 팬들이 중국 응원팀에 섞여 있었는데, 경기에서 진 중국 응원단으로써는 화풀이를 그들에게 한 셈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우리 응원단 속에 중국을 응원하는 몇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우리 국민이라고 하더라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는 말이 왜 그리 난처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각설하고 오늘 본문에는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사령관 르훔과 비서 심새 그리고 여러 관리들과 페르시아 황제가 이주시킨 디나 인들 적어도 8개 인종들이 아닥사스다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립니다. 그 내용은 에스라를 비롯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음해하는 고자질로, 요약하면 성벽을 다 쌓은 후에는 아닥사스다 황제에게 조공도 세금도 그리고 관세도 바치지 않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틀림없이 국고에 큰 손해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이는데, 이 반역자들의 과거를 살펴보면 반역질을 상투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페르시아 황제 아닥사스다의 회신은 예상대로입니다. 그들이 보낸 상소문을 잘 읽고 조사를 시켰더니 황실에 반기를 든 사례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점과 과거의 이력으로 봐서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다며, 우선 공사를 중지시키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 짓는 일도 중지시키게 하는데 차기 황제 다리우스 2년까지였습니다. 요즘 말로 팩트 체크(Fact Check)가 필요했지만, 사실이 절반만 있다면, 예나 제나 사람들을 속이기란 누워서 떡먹기였습니다. 시련과 장애 없이 보람과 기쁨은 없는 법이었습니다. 옛 말에도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이 생긴 데에는 이런 저런 경험치가 보태졌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선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은 어찌하여 선한 일에도 시련을 주시느냐?” 항변해선 안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