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을 주목할 이유들. / 눅 1:57-66.
묵상자료 8260호(2023. 12. 28. 목요일).
시편 시 37:16-18.
찬송 5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을 두고서, 왜 흐른다 말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유유자적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들을, 아마도 우리는 흐른다는 말로 변명하고 있는 듯합니다. 흐르는 것이기에 잡을 수 없고, 또 내 뜻대로 어찌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빗물은 시내에 떨어져 시냇물이 되고, 시내가 바다로 흘러 결국 바다의 일부가 되지요. 더 커다란 것으로 나가는 대신,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고 맙니다. 물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소멸의 미학을, 시간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간을 얻기 위해서, 결국 지금의 시간은 반드시 소멸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간이 지니고 있는 소멸의 미학이지요?
“꽃잎이 지는 곳으로 흐르는 나날들/ 손잡고 가던 길 손 놓고 갔었네/ 긴 그리움 드리우고 꽃 길 따라 그대 가네/ 연분홍 꽃눈이 하얗게 덮이네/ 사랑한 그대 모습 아득히 떠나가니/ 눈물이 흐르네 소리 없이 흐르네/ 바다가 물결치는 곳으로 흐르는 나날들/ 말 한마디 못하고 혼자 울었네/ 어둔 길 물어물어 물길 따라 그대 가네/ 그믐달 기울더니 물새 소리 잦아드네/ 사랑한 그대 얼굴 고요히 멀어지니/ 눈물이 흐르네 소리 없이 흐르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우리는 초연해 질수밖엔 없습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란 본래 멈춰 있지 않고 늘 흐르게 마련이라는 것 같은 일이 그렇지요. 그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어지는 대로 우리에게 허락된 것들을, 조심스럽게 누리는 일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요. 그저 어느 한 순간 뒤돌아 봤을 때, 너무 많은 후회가 남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권 선옥 시 정 희치 곡 <흐르는 나날들>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12월 26일 방송>
2. “세례요한의 출생(57-66절)”을 읽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사회에서 가장 저평가되는 인물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세례 요한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 생각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충분합니다.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예언자는 없고(눅 1:76-79), 세례 요한보다 더 훌륭한 설교자는 있을 수 없으며(눅 3:3-14), 세례 요한보다 더 겸손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며(눅 3:15-18), 세례 요한보다 더 장렬한 순교자(막 6:17-28)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에 바탕을 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 교회는 세례 요한을 역사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또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밀어내고 있어서 분노를 느낄 정도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세례 요한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는데도 불구하고(눅 7:24-28), 어찌하여 이처럼 평가 절하한 것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많은 생각이 흘러 들어오고 나갔습니다.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이 미치는 것은 세례 요한을 치켜세우면 세울수록 행여 예수님을 신앙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평생을 거친 광야에서 생활하며, 거친 음식과 옷 그리고 불편한 삶을 감수하다 끝내는 헤로디아의 계략에 제물로 목이 잘린 위대한 순교를 한 분을 말입니다.
그래서 였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기자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탄생 예고나(눅 1:5-25/ 눅 1:26-38), 탄생 이야기(눅 1:57-80/ 눅 2:1-20)에서 세례 요한에 대한 내용을 훨씬 길고 자세하게 서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선교 활동에 대한 기록에서도 누가복음서 기자는 훨씬 더 많은 양의 자료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 기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례 요한의 출생배경을 안내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현직 제사장 사가랴이고 어머니 엘리사벳 역시 제사장 아론의 후예였으니 정통 제사장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나이마저 늙어버렸습니다. 하루는 성소에서 기도하던 제사장 사가랴에게 천사장 가브리엘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며, 믿지 못하는 사가랴에게 아이를 낳을 때까지 말을 못하도록 합니다. 아이는 태어났고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으러 성전에 갔을 때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의식을 거행하는데, 집례자들은 아이 아비의 이름 따 사가랴라고 부르겠다 합니다. 그러자 모친 엘리사벳이 요한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집안에 이런 이름이 없다며 갸우뚱할 때, 벙어리 된 부친 사가랴가 서판에 “아기 이름은 요한”이라고 써 보이자 그의 입이 풀려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찬미를 올렸다 전합니다. 예사롭지 않은 탄생일화입니다.
3. 저의 블로그 lutherfriend.tistory.com <설교 계획 안내> 통해서 2024년도 주일 설교를 계획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