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야훼의 보증의 말씀들. / 사 55:3-9.
묵상자료 8274호(2024. 1. 11. 목요일).
시편 시 39: 1-3.
찬송 7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홍 일중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은발의 은빛 수염이 멋들어진 신사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말재주가 좋아 사람들 앞에서 입담을 자주 과시하기도 했고요. 함께한 지인들의 초상화를 즉석에서 그려낼 만큼 시인은 손재주도 누구 못지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를 접하면 그의 모든 직함을 뛰어넘어 그가 시인이라 불리고 있는 까닭을 알 듯도 합니다. 정갈한 언어의 배열을 통해 홍일중 시인의 시는 읽는 것만으로 하나의 풍경이 떠오르곤 하지요.
“아가의 숨을 품고 오는 바람아/ 때로는 하늘가에 부는 피리여/ 만 가지 부여안고 막힌 가슴에/ 보름달 덩그러이 뚫어가오리/ 산도 물도 쓸어안고 허허로워라/ 무리지어 무리지어 가는 무리여/ 하늘이여 하늘이여 내 품 내 품이어라/ 간밤의 까만 어두움 벗한 바람아/ 때로는 바다 끝에 이는 놀이여/ 달빛에 짓눌리어 굽은 등허리/ 민들레 솜꽃처럼 날아 가오리/ 산도 물도 쓸어안고 허허로워라/ 무리지어 무리지어 가는 무리여/ 하늘이여 하늘이여 내 품 내 품이어라.”
시인이 시어로 선택한 단어 하나하나는 섬세하면서도 너른, 선비의 기백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홍 일중 시인은 <그리운 금강산>의 후속작인 <금강산 4계 연가곡>을 작곡가 최 영섭과 함께 완성해 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금강산의 가을 정취를 담아낸 가곡이지요. <천년의 그리움> 이라는 곡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바람아 외에 시인은 한라산을 우리말의 어원 그대로 담아 낸 <하나산아> 그리고 보연봉 같은 곡을 통해서 남성적인 취향의 노랫말로 우리 가곡 노랫말의 폭을 넓혀가고 있지요. 홍 일중 시 이 수인 곡 <바람아>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년 1월 10일 방송>
2. “영원한 계약(3-5절)”과 “너그러우신 야훼께 돌아오라(6-9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이라는 것이 쉼 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한 후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란 경구를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붙잡아 두려고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적어도 그 많은 시간들 중에는 매우 귀한 시간이 있을 테니 그런 시간을 잘 활용하라는 말입니다. 이른바 기회(機會)를 놓치지 말고 선용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우리들 삶의 순간순간들은 모두가 기회가 아닌 때가 없었던 것을 뒤늦게 깨닫곤 합니다. 가족들과 부대끼며 살던 때도, 친구들과 철봉대 밑에서 씨름하던 때도, 교실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던 때도, 예배를 드릴 때도, 아내를 만나게 될 때도, 자녀를 기를 때도. 어느 한 순간도 기회가 아닌 순간이란 없었습니다. 그 모든 기회를 다 제대로 붙잡을 수는 없다 해도, 그 중에서 몇 개만이라도 붙잡은 사람은 이른바 나름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통째로 날려버리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됩니다. 야훼를 찾으라. 그를 불러라. 가던 길을 돌이켜라. 생각을 고쳐라. 돌아오너라. 그러면 자비롭게 맞아주시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당당한 말씀에 대해서 의문을 갖거나 회의를 가지는 사람들을 생각함인지, 그 보증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고 말입니다. 또 다시 보증하듯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고 하십니다. 갑작스럽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의 차별화를 시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인간의 생각이 다름을, 하나님의 길과 우리 인간의 길이 다름을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무엇이며,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별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뜻과 자식의 생각의 차별을 대입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위한답시고 월급을 받으면서부터 그분들이 별세하실 때까지 일정액수를 용돈으로 전해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위해서 만 쓰셔야 합니다.”고 말씀드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일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동생을 위해 전부를 다 쓰셨습니다. 제가 불효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십시오.”라고 말씀드렸어야 했습니다. 높고 깊은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었을까요?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