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믿고 의지하는 것은 자기 욕망 뿐. / 요 5:30-47.
묵상자료 8288호(2024. 1. 25. 목요일).
시편 시 41:4-6.
찬송 34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양탄자 무늬와 같다는 구절을 책에서 봤습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일들은 하나하나 나름의 의미가 잇는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들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뜻인데요. 씨실과 날실이 서로 교차하면서, 양탄자위에 뭐라 형언하기 힘든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 내듯이, 결국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도 평이/平易한 삶에, 그저 무늬를 만들어낼 뿐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삶이 본래부터 치밀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즉흥적이고 우연에 이어짐으로 완성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 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내가 만든 양탄자 무늬들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오겠지요. 썩 거창하거나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후회로 남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하나의 양탄자로 조금씩 완성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왠지 시간의 의미가 숭고해 지는 기분이 듭니다. 소진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쌓여 간다는 상상만으로 시간의 가치가 배는 높아지는 듯 하지요. 아직 조금씩 이긴 하겠습니다. 그 완성 물을 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 생의 마지막에 모두가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완성해온 양탄자를 바라보는 모습은,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동화 한 편을 보는 거 같습니다. 마음의 경계를 느슨하게 하는 한 순간이, 양탄자의 매듭을 허술하게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순간일지라도 허투로 보내지 않고, 곱씹으며 소중하게 보내야 하겠습니다.
영국의 작가인 윌리엄 서머셋 모음은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 계속하다 보면, 결국 나름의 철학이 우러난다는 뜻이겠지요. 반복되는 일일 수록 나에게 더 적합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곤 합니다. 비록 그 모든 행위들은 너무나 일상적(日常的)이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의식중에 일어나곤 하지만 말입니다. 한 동안 떠나 있다가 돌아 와 보면, 그동안의 일상들은 갑자기 새롭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오래지 않아서, 다시 금세 본래의 리듬을 되찾게 됩니다. 그래서 일상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아닐까요.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늘 일어나면서도 소중하다는 뜻에서 말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년 1월 25일 방송>
2.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증언(30-47절)”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제가 가장 힘들어 하는 대목이 바로 오늘의 말씀과 같은 경우입니다. 가령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나, 변모 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신비한 음성 같은 것은 이해를 하려고 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나님의 의도나 계획을 대신 말씀하실 때는 매우 힘들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육신을 가지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말씀 속에는 영적인 세계를 살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렇게 들으려고 힘써 보겠는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영계/靈界를 왕래하고 계시는 때문이니 너무 낯설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당대의 주님의 주변을 맴돌던 유대인 지식인들이 주님을 싫어하고 미워했을 것입니다. 몇 차례 소개드린 바 있습니다만,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언덕을 올라가면 오석에 새긴 <예수의 묘>를 만날 수 있는데, 33년을 세상에 살았다는 이력 이외에는 모두가 거짓말처럼 들리고 혐오감마저 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서 하나님처럼 말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심판하니, 내 심판은 올바르다느니, 내가 나를 증언하면 참된 증언이라 할 수 없지만, 나를 위해 증언하는 이가 따로 있으니 그의 증언은 참되다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사람의 증언이 내겐 소용없는 일이나 다만 너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면서, 요한이 당신을 위해서 했던 증언을 꺼내시며, 요한의 증언보다 더 나은 증언이 있으니 그게 바로 하늘 아버지의 증언이라고 하는 말씀 등에서 말입니다. 거기다가 너희는 아버지의 음성도 들어본 적 없고, 모습을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를 믿지도 않으니, 너희 마음에 믿음이 있을 턱이 없구나. 너희가 성경에는 생명이 있다고 연구하고 있는데, 그 성경이 나를 증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내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에 온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제 이름으로 오는 이단자들은 받아들이는 구나 는 말씀에서 우리의 정체가 들어납니다. 박태선이나 문선명, 그리고 수도 없이 꼬리를 물고 독버섯처럼 고개를 쳐드는 수많은 이단자들에게는 온갖 것들을 다 빼어주면서,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영접하지 않았었다는 말씀 앞에서 멈춰 서게 됩니다. 주님은 이런 그들과 우리를 향해서 모세가 너희 죄를 고발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다만 모세를 믿는다면 나를 믿을 수 있을 텐데, 모세의 기록들은 나에 관한 내용이라면서, 모세의 글도 믿지 않으니, 어찌 나를 믿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손잡이만 남은 부지깽이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기대와 욕망만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